이숍 우화의 “사자와 생쥐”의 공존 관계 생각나는 시간이다.
필자가 사는 나라는 노동법과 노동 재판소가 분리 되어
노동자의 권익을 우선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개념은 구성이 복잡 다단하고
노사간의 이해관게와 정부의 중개 역활도 어렵기만 하다.
최근 뉴스에 조계종 스님들과 국회 의원의 불편한 시비와
이에 관련된 노총 위원장의 옥살이 기사도 읽어 본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하다가 전과자가 된 것이다.
참으로 슬픈 노동 현실을 보고 있고
만일 한국의 가업이 이 나라에서 경영을 한다면
수년을 못 넘기고 꼭 도산할 것을 확신한다..
필자는 현지에서 자영업을 하며 질이 나쁜 노동자를 해고하고
7년의 장기 노동 재판을 한 경험도 있는데,
노동자가 도둑질을 한 것은 형법에 관한 소관이고,
해고는 노동법에 준하는 관활로 노동법의 소추를 당하는
입 맛이 쓴 경영자의 고충과 테러도 당할 뻔 했다.
필자의 경영학 석사 학위 논문은 노사 관계 논술이다.
안정된 사회의 분배 구조는 노사간에 분배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일견하는 한국 대기업을 보면 이들은 독재자들 일 뿐이고
정책 당국자의 비호 아래 노동 착취의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경제 안정 선진국이란 말을 듣기엔 요원하기만 하다.
밀림의 사자는 설원의 곰이 이해가 안 되고,
설원의 곰은 밀림의 사자가 이해가 안 된다.
설원의 지배자라도 살아가기란 만만찮고,
밀림의 지배자라도 살아가기란 녹록찮다.
우산장수는 소금장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금장수는 우산장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산장수는 우산장사 외엔 엄두를 못 내고,
소금장수는 소금장사 외엔 엄두를 못 낸다.
우산장수는 소금장수의 장사 속을 모르고,
소금장수는 우산장수의 장사 속을 모른다.
못마땅해도 사용자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못마땅해도 노동자는 사용자가 필요하다.
사용자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얼버무리나,
노동자는 “노동이 고단하다.”고 중얼거린다.
“노동이 신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노동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사용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강조하나,
노동자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항변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많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여기는 자는 드물다.
강자는 소득분배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약자는 소득분배가 “불평등하다.”고 여긴다.
답답한 생존만 아니라면 노동은 탐탁찮고,
절박한 생존만 아니라면 막일은 달갑잖다.
출발은 좋다 해도 경쟁의 승자는 소수이고,
출발은 좋다 해도 경쟁의 패자는 다수이다.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상처받기는 쉽지만,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위로받기는 어렵다.
오늘 여의치 않으면 내일을 기약해야 하고,
내일 여의치 않으면 모레를 기약해야 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란 여간해 쉽지 않고,
회한 없는 인생을 살기란 여간해 쉽지 않다.
삶이 고달프다 해도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삶이 고단하다 해도 밤은 또다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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