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 보면 “아가서”나 저주하는 내용을 접한다.
이런 심한 내용의 어투를 필자도 저주는 아니지만 가정에서 한 체험이 있다.
내가 허물을 범해도 이런 내용을 기록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민망한 내용이나
도를 넘는 내용들이 성경엔 간혹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시편 109편이다.
시편 109편을 읽다 보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저주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믿는 자들은 지울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저자가 바로 다윗이기에 받는 충격이 더 크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
자기 죄를 아파하며 눈물짓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막말과
시정잡배와 같은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많은 신학 이론가들의 신학적인 해설은 잠시 옆으로 접어놓고 내말만 하고 싶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 중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눅 23:34)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더욱이 산상보훈의 다음 말씀을 생각하면
시편 109편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난감해진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그러나 분명히 시편 109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저주 기도다.
그것도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기도다.
다윗은 그냥 넋두리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조급했던지
1절부터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급하게 하나님을 부른다.
숨넘어가는 소리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요즘 말로 한다면 SOS 긴급 요청이나 119 긴급 구호 요청을 한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상처 입은 감정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도하다.
근본적인 치유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주식에서 바닥을 치면 다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상한 감정을 완전히 토해 내면 그 다음에 치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감정의 토로를 사람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라는 것이다.
상한 감정을 사람에게 토하면 당장은 시원할지 몰라도
뒷수습이 안 될 때가 많다. 속을 보인 수치심이 남기 마련이고,
또 말이란 돌고 돌기 때문에 감정의 악순환이 일어나기가 쉽다.
사람에게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약간의 유익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상한 감정을 하나님께 다 털어놓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하나님은 주홍같이 붉은 죄도 흰 눈같이 씻어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지 잘 아신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전능하심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다.
영혼과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상한 감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쏟아 놓았다.
저주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서 밑바닥까지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그리도 아프게 했던 사람의 손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시 109:26, 28).
하나님은 눈물을 웃음으로, 재를 화관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다.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손길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임을 믿었다.
아이들 놀이에 ‘반사’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 자기에게 욕을 하면 손바닥을 내밀고 “반사”라고 말한다.
그러면 오던 욕이 손바닥에 반사되어 다시 그 사람에게 되돌아간다는 놀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런 분임을 알고 있었다.
적대자가 자기를 저주해도 하나님이 “반사”가 되셔서
자기는 해를 입지 않고 그 당사자가 해를 입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기에 다윗은 즐거워할 수 있었다.
다윗은 악인이 저주를 받고 의인이 회복될 것을 이렇게 기대한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 109:27).
저주 기도의 핵심은 상대를 저주하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회복이다.
상대방이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되었다고 내 감정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원수가 망하면 한동안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감정 치유는 별개의 문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상처 입은 내 감정이 치유되는 것이다.
내가 치유되고 회복되어 행복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원수가 아무리 저주를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상처 입은 내 영혼의 치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 하나님이 내 원한을 들으셨다는 믿음,
하나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
하나님이 내 저주 기도마저도 들어 주시리라는 믿음,
하나님은 악인에게 벌을 주시며 의인에게 상을 주신다는 믿음,
피눈물과 쓰라린 감정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믿음,
이 세상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상처 입은 내 영혼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
그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때 비로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필자의 변:상처 받은 일을 목사들과 조언을 받기 위해 상담을 해 본 경험이 있는데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넘기는 목사나 우물 쭈물하며 기도로 얼버무리는 목사?
농담처럼 들으며 넘기는 입 맛 없는 목사도 만난다.전혀 도움을 주는 자들이 아니다.
거룩한 성전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이기적인 명성을 사랑하며 거짓된 미소를 얼굴에 짓는 자들로 본다..
위선적인 상담 경험도 있고 이젠 나는 이들과는 절대 상담을 안한다.
하나님은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탄식과 한숨 소리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처 난 내 감정을 어루만져 주신다.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한 감정을 정화시켜 정감으로 바꾸어 주신다.
상처 입은 영혼을 새롭게 하며 정화시키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상한 감정이 하나님의 긍휼하신 어루 만짐으로 정화되어 정감으로 바뀔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영혼의 자유와 은총을 누릴 수 있다.
'♠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마존 강 관광-(마나오스:브라질) (0) | 2016.01.24 |
---|---|
감동복음성가모음 (Vol.12) 감동찬양 (0) | 2016.01.24 |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0) | 2016.01.24 |
물의 가르침 5가지 (0) | 2016.01.24 |
교육의 핵심은 경쟁(競爭)이 아니라 상생(相生)이다.(모신 글) (0) | 2016.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