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코람데오는 'coram Deo'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라틴어로 'coram'은 '앞에'라는 뜻을 지니고, 'Deo'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 두단어가 합쳐져서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부패했던 중세 신앙가운데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름을 높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권위아래 살며 하나님 안에 사는 삶의 방식을 요약해서 주창했던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 앞에(coram hominibus)' 잘보이고 '세상 앞에(coram mundo)' 명예롭고 잘 살기 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구하며(롬12;2) 사는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 답이 될까요? 교회가 살고, 기업이 살고, 학교가 살고, 가정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정직이 강물처럼 넘쳐 흘려야 하겠다는 것이 저희들의 인식입니다.
마이클 브린이란 영국 기자가 있습니다. 15년 이상 한국을드나들었습니다. 브린은 택시 기사들의 운전 방식을 예로 들어 한국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법 없고, 이기적이고 거칠다’(lawless, selfish and rude)고 표현합니다. 한국사회를 발목잡고 있는 것이 부패라는 분석도 해 놓고 있습니다. 공정 게임이 되지 않는 사회란 것이지요.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최고의 선결과제가 정직임은 이제 자명하게 되었습니다.
정직해야 할 이유가 이것뿐인가요? 나라가 잘 살고 선진사회가 되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좀 더 나은 사회에서 살게 하기 위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정직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해야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 존재 자체가 곧 정직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분은 아마 곧장 이렇게 반응하겠지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는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분,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이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신분의 변화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지요.
성경 가운데 이 문제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에베소서 5장 8절과 9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정체성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존재가 바뀌었으니 이제 빛의 자녀로 살라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 곧 선함은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선대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올바름입니다. 옳은 일, 옳은 생각,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진실함은 거짓이 없어 신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주제인 ‘정직’은 바로 이 의로움과 진실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르게, 옳게, 정당하게, 거짓 없이 사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 삶이 의로움과 진실함에서 거리가 있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존재와 신분, 정체성은 변했는데도 열매가 없다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정직은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해야 함을,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의롭고 진실해야 함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강조합니다. 예컨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 11-1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 22).” 두 곳에서 다 같이 디모데가 힘써 갖추려고 애써야 할 덕목으로 믿음과 사랑, 경건과 화평, 인내와 온유와 함께 두 번이나 바울은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에베소서에서 말한 ‘의로움’과 같은 말입니다. 다 같이 헬라어로 ‘디카이오수네’를 쓰고 있습니다. 이 뿐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할 때도 ‘디카이오수네’입니다 (물론 동사로 말하자면 ‘디카이오오’이지요).
좀 헛갈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 그래서 칭의와 관련된 경우를 말할 때와 신분과 존재의 변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열매를 말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얻고자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덕목을 열거할 때 다같이 ‘디카이오수네’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낱말의 남용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살던 헬레니즘의 세계를 조금 알면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헬라 세계에서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최소한 네 가지를 말했지요. 지혜, 절제, 정의, 용기가 그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4 덕’ 또는 ‘4추덕’(四樞德), 영어로 four cardinal virtues라고 하지요. 추기경의 덕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덕이란 말입니다.
이 중에 ‘정의’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 ‘의로움’과 같은 헬라어인데 오늘날은 흔히 ‘공정성’, ‘공의’ 정도로 좁혀 이해하지만 사실은 정직, 올바른 거래, 진실, 약속 준수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 ‘의’, ‘올바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헬라 사람들은 우리가 ‘덕’이라 하는 것을 ‘아레테’라고 했습니다. ‘탁월함’, ‘뛰어남’을 뜻합니다. 칼의 덕(뛰어남)이 잘 베는 데 있고, 음식의 덕(뛰어남)은 영양을 잘 공급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혜, 절제, 정의, 용기는 사람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자질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 전통보다 더 근본을 파고들어 갑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공정할 수 있는 자질의 뿌리는 내 자신이 아니라 빛 되신 하나님이라 본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나서는 누구도 의로울 수 없고,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로울 수 있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그런데 의롭게 하시는 그 의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열매로 드러난다는 것이 또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는 사역의 결과이지요. 그럼에도 어두움과 지속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의로움과 진실함을 얻고자 애써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려면 그 분 자신이 정직이요, 진실이요, 의로우신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분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의로움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내자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품성이 되고 우리의 성격이 되고 우리의 체질이 되도록 끊임없는 노력과 추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으라“고 말하지요. 따르는 데는 땀과 고난과 시련이 따릅니다. 이 시대 우리가 실천해야 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직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배웠습니다. 정직은 신뢰의 원천이고 신뢰는 타인과 관련해 행위를 유발하는 가장 근본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일도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믿음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정직이야 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법칙 중의 하나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법칙의 주인인 하나님을 모를뿐더러 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정직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성도들이 느리고 무감각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다 같이 생각해 보고 삶에 옮기도록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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