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부모란 이름의 청지기 삿 2:8-10, 엡 6:4

비타민님 2018. 11. 18. 16:24

        학도가-1920년대 창가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부모의 모습과 해야할 일.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들을 부모는 손수 행하며 본이 되어야 한다.

 

필자가 사는 아르헨티나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각박해지다 보니

어린 자녀를 유기하는 가슴 아픈 뉴스를 봅니다.

생활고로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겁니다..

5살백이가 2살의 동생을 돌보는 눈물나는 사연입니다..

가난한 이웃사람들이 보살피고 있다고 합니다

또 자녀들에게 끼쳐질 상처와 해악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기 보다

지금 당장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에만 집착하다가

이혼을 하며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도권 인근의 빈민촌에는 쓰레기장에서 음식을 찾는 일도 허다합니다.

밝은 대낯에 가정 집 대문을 여는데 강도가 나타나고 총칼로 살상도 합니다

 

오늘날 현지에서 보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점들은

극심한 사회 정치 부패와 교육의 부재,도덕성 결여의 문란한 성관계,..

부모가 자녀들에게 건전한 본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모가 참다운 삶의 본을 통하여 자녀를 양육하기보다는

자신은 간음과 못된 짓을 하면서 돈으로만 자식을 양육하려는 자도 있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만 반드시 성공한 인생은 아닙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사는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복을 주시는 믿음도 있지만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주님의 교회는 필수 불가결합니다..

부모의 삶을 통하여 가르쳐야 할 하나님을 경외함, 이웃을 위한 배려,

자기 희생의 삶 등이 마음 깊이 새겨지지 않으면

자녀들은 사회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알아야만 합니다.

 

자녀 교육을 실패한 부모

성경에도 올바른 본을 보이지 못하여

자식을 망치고 본인도 망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무엘 때 사사로 있던 엘리입니다.

그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라고

사무엘상 2 12절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중에서 좋은 것을 가로채고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들을 추행하였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퍼진 소문을 전해 듣고

따끔하고 야단을 치고 벌을 주기는커녕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미적지근하게 이야기를 하니

그렇지 않아도 불량자인 아들들이 아버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악한 짓을 저지르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두 사람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같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보병이 삼만 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법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은

엘리는 너무도 놀라 뒤로 자빠지다가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잠간 필자의 지난 이야기 입니다..

아이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을 때에 형제들이 모르게 조용한 곳에서 

매를 든 적도 있지만 그 순간은 내 자신이 더욱 아펐습니다.

내 아이 하나가 잘못을 했는데,학교 교감이라는 여자가 '애들은 전부 그렇내며 

별 일이 아니라는데...|이 일은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는 시초입니다.

나무 가지도 연할 때에 바로 잡아잡아야 합니다.

조퇴를 시켜서 집에 와서 가느다란 플라스틱 깃발 대를 환단에 쓸려고 사온 것이 5개 있는데

이걸로 딱 3대를 종아리를 칩니다..세게 안 때렸는데 어린 아이 종다리에 피멍이 들었고,

학교 교감이 이 걸 알고 어린이 학대로 나를 가정 법원에 고발을 합니다.

아이에게 자세한 일을 족치니 훔친 돈은 교감이란 여자가 꿀걱한 도둑년입니다.

법원에 2년 동안 불려다니며 별 소리를 다 듣는데.(심리 상담자란 미친자들로 있음).

이 사건 때문에 이웃 나라 여름 휴가도 가족들이 못가는 겁니다.

사면 초가 정말 혼자인데,어느날 법원 판사보에게 가서 차분히 변명을 합니다..

다행히 이해를 하면서 걱정하지말고 휴가를 가라고 하며 

휴가 후에 판사에게 말해서 기소유예로 없던 일로 해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후에 고발 건은 기소 유예가 되었습니다..

미적지근하게 자식을 키우면 안된다는 필자의 안생관입니다..

목사도 강단에서는 침을 튀기며 흥분해서 성경 말씀 뀅과리 설교는 해도 

이런 일에 상담을 하면 해결책을 제시못하는 벙어리임을 체험합니다..

이와 같은 목사들이 남아 돌아 갑니다.말과 행동이 다른 성직자들 입니다.

 

자녀 교육을 실패한 세대

한 부모가 자녀들을 잘못 양육한 정도가 아니라

한 세대 전체가 실수를 한 적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출애굽을 경험한 출애굽 1세대의 역사를 다룬 것이라면

여호수아서는 출애굽 2 세대를 다룬 역사요,

사사기는 출애굽 3세대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애굽에서 태어나 뼈가 굵은 세대입니다.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나 노예로 일을 하다 보니

노예근성에 푸욱 젖어 있었습니다.

몸은 애굽을 떠났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광야 여정에 조금만 힘들면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자꾸 과거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보았고,

홍해가 갈라졌을 때

그 뒤를 쫓던 애굽 군대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고,

낮에는 불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갖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생활 힘들다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 대한 원망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정탐꾼들이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 ...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 13)

보고하니 백성들은 낙심하여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

차라리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기분이 나쁘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는데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다 죽게 하였습니다.

 

출애굽 2세대는 애굽에서 나올 때 스무 살 이하였거나

광야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1세대가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하다가

광야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실하고 경건한 여호수아의 리더십 아래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버지 세대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정복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출애굽 3세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전쟁도 그친 평화 시대에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났습니다.

2세대가 하나님을 믿으며 힘들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으나

그들은 그 정복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고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 세대를 따라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저 믿는 시늉을 했을 뿐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라면서 주변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대신 그들의 우상을 섬기고 그들의 생활양식을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를 알지 못한 세대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세대”(2:10)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없었습니다.

부모세대는 믿음이 좋았는데

어찌하여 그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믿음을 제대로 심어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사는 한국인2세들은

과연 출애굽 어느 세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출애굽 1세대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있고

2세대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0세기 초기 구한말에 시골에서 인천 부두에 입항한 증기선을

구경하러 왔던 젊은이들이 꼬임에 빠져 증기선에 오르자

배는 출항을 하고 반 노예의 신분으로 일정기간 동안 노동자로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민을 왔던 사람들의 자손들은

벌써 4 5대째가 되었습니다.

어느 세대를 본받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면에서

당연히 출애굽 2세대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문제점은 있었습니다.

2세대들도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을 필두로

가나안 칠 족속을 차례로 물리치며 가나안 정복전쟁을 벌이느라

너무 분주하고 바쁘게 힘들게 살다보다

자식들의 신앙 교육에 신경을 쓸 겨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녀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오늘 아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신경을 쓰든지 안 쓰든지 자녀들은 자랍니다.

한 십년 전에 지인인 현지인의 딸 졸업식에 간 적이 있는대,

우리 한인 2세들을 봅니다.

꼬질 꼬질한 떼국이 젓은 옷에 볼리비아 2세애들하고만 어울립니다

현지인 지인의 딸아이가 나에게 하는 말이

한인 2세들은 볼리비아 2세들과 같아서 공부도 못하고 더러워서

현지인 아이들은 어울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장성해서도 인종차별 운운 합니다.

어느날 법대 다니는 한인 2세를 알게 되는데 현지 태생입니다.

이 학생이 자기는 인종 차별로 법대 학년 진급이 안된다고 하는데,

우리 애들은 정상적으로 졸업을 합니다.

이 학생은 자신이 무언가가 부족한 걸 모르는 겁니다.

 

이제 이민살이도 살 만하게 되어 자녀들을 돌아보려 할 때

그들은 이미 부모가 주관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굳어졌고 커졌고

부모의 곁을 떠납니다.

부모가 아무리 신앙이 좋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바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였다 할지라도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때

자녀들은 그저 세상에서 본 대로 들은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민 사회에 교회와 목사 장노 집사는  넘치게 흔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민사의 현지인화 동화도 이해가 갑니다.

바로 가나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3세대 이후의 모습입니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아버지 세대가 가졌던 신앙에서 떠나

그들 주변에 있었던

가나안 신을 섬기는 안타까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마음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겠습니까?

부모들은 신앙을 가졌지만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제대로된 신앙교육을 하지 못한

그들의 실수를 거울삼아야 합니다. (본인도 해당이 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듯이

오늘날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신앙적이지 못한,

유교적인 악습인 부모의 영향권 속에서 성장한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선배나 후배가 없는데,

유독 선배 목사,원로 목사,창립장노,모태 신앙?..

종의 도를 믿는다면서 토백이 주인 노릇하기에 열심입니다..

이민 온지 20년이 넘는 성직자가 여전히 2세들에게

한국 말로 설교를 하는데…2세들은 당연이 소귀에 경 읽기 입니다.

남녀 노소 가르는 성차별과 장유유서 버릇은 여전합니다.

이런 분들은 업 그레이드를 해야지 항상 앵무새가 되면 안됨니다.

이 모든 모습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현지에서 자녀를 양육하게 될 때 건강한 부모 모델을 보지 못한

그들의 자녀들을 건강하게 양육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부모들일수록 자신의 문제점부터 먼저 인식하고

유교적인 악습인 세대 간의 어른 대접은 자기 세대에서 끊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어머니

물론 성경에는 역기능적인 부모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21장에는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통치 기간 중에 3년간이나 계속되는 심한 가뭄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재해의 원인이 

사울과 그의 집안사람들의 범죄 때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울 왕과 그 집안사람들이 가나안 정복 당시

기브온 사람들과 맺은 평화조약을 깨뜨리고

기브온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행동을 죄악으로 취급하셨고

기브온 사람들의 원통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이스라엘을 자연재해로 징계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가 돈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면서

사울 집안 남자 7명의 목숨을 요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제외하고

사울 집안에서 7명의 남자들을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죄의 대가로 사울 집안 남자들이 죽어야 한다 할지라도

자식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울의 첩이었던 리스바는 그 일로 인하여 졸지에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의 시체는 바로 장사를 지낼 수도 없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극악한 범죄로 처형된 사람의 경우에

새들과 들짐승들이 그 시체를 훼손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경고를 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리스바는 굵은 삼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깔고

추수가 시작된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질 때까지

무려 6개월 동안 낮에는 시체에 독수리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나

자기가 힘든 것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행여 두 아들의 시신이 짐승들에게 찢길까 하여

곁에서 눈물을 흘리며 짐승을 쫓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리스바에게서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침내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일곱 사람의 시체와 더불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의 뼈들을 가져와 합동 장례를 치름으로써

사울 집의 수치를 가려 주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가 끝나고 땅이 회복되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름다운 행위를 인하여

저주와 수치가 중단되었습니다.

아들들이 죽었기에 리스바가 갑자기 그런 사랑을 가졌을까요

아닙니다. 평소부터 아들들을 사랑했기에 

죽은 후에도 그들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품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로서 죽은 아들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

그런데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셨고 완전히 잊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시면서

그 사랑을 어머니의 것과 비교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9:15)

 

이 세상에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 혈연관계요,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어머니는 자기 배로 잉태하여 낳았고

어렸을 때부터 젖을 먹여 키웠기에 절대로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잊지 않겠지?

그런데 어머니가 혹시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구원 받을 자들의 명단을 손바닥에 새겨 놓고 늘 보시며 

그들을 통하여 다시 회복될 성벽을 눈앞에 그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목숨 바쳐 우리를 사랑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한 청지기로 부름받았습니다.

오늘날 세태가

지금부터 30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세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면서

성경적인 가치관보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세상 사람들의 탐욕스런 삶을 따르고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본을 보여주는 것이

믿는 부모들의 사명입니다.

믿는 부모에게 자녀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께 속한 귀한 생명입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자녀를 돌보는 청지기임을 잊어버리고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고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대신

그 사랑을 볼모로 자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비뚤어진 사랑으로 자녀가 고통 받지 않도록

우리는 늘 스스로를 경계하며

선한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자녀가 가야 할 길을 더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먼저 자녀들을 향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얻었다고 저절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을 감당해가며 참 부모로 성장해 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영적 부모 된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부모, 모두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그 사랑을,

모든 것을 내어주고 또 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은 그 마음을,

자녀의 아픔이 부모에겐 두 배, 세 배가 되어 돌아온다는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의 양육을 가정에서의 양육에 비유하며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을 보면 스승이신 바울 선생님은

교회를 위하여 섬기는 일을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2:7) 하고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2:11)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합니다.

유모가 자녀를 기를 때 세심하고 부드러운 보살핌이 있어야 하고

온갖 수고와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엄한 경계와 위로와 권면이 이 위에 더해져야

자녀들을 균형 있게 키울 수 있습니다.

보살핌과 훈육, 이 양면의 수고를 기울이지 않고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6장에서 바울은 “피차 복종하라”는 원리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이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을 대하듯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가 바른 관계를 맺을 것을 권면합니다.

특별히 4절은 부모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앞 절에서는 자녀를 향해 ‘부모’에게 순종하라던 바울이

이번에는 ‘아비들’만을 향해 권면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 사회 뿐 아니라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아버지는 그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의 경우,

아버지가 맞아들이면 양육되는 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아이는 내버려졌습니다.

또 아버지는 자녀를 노예로 팔 수 있었고

죽음에 이르는 벌까지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소유 정도로 취급되는 그런 시대에

바울은 자녀의 감정까지도 섬세하게 배려하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권면을 합니다.

아버지들은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이용해

자기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소유의 인격체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자기감정에 따라 자녀를 거칠고 난폭하게 대하거나 

지나치게 편애하거나 수치심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분개하고 원망을 일으키게 하는 자세,

, 행동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 분노가 속에서 상처로 남아 쓴 뿌리가 됩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기에

커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바울은 부모의 권위보다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더 강조합니다.

부모들부터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하며

노엽게 하기보다 아이들을 격려할 것을 촉구합니다.

건강한 가정은 부모가 그 자녀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경계선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건강한 부모는 방황하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며

반드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부모가 어떻게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1) 자녀를 위한 말씀양육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하려면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고

진정한 복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약속을 붙들고 살도록 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에도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복은 마른 우물과 같습니다.

비가 올 때는 풍성한 것 같지만 가뭄이 오면 다 말라버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복의 샘물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 없이 효도와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다만 일반사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 안에서” 순종하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교훈이라 번역된 ‘파이데이야’는 교육, 훈련이란 의미도 있고

체벌의 의미도 있습니다.

올바른 징계와 교훈은 성경적이요 참다운 사랑의 표현이요

자녀들을 바로 세웁니다.

둘째가 훈계인데 주로 말로 타이르면서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이 주님을 닮아가도록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받고 치료받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병들어

예배의 감격과 기도의 능력과 감격을 잃어버리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반복하면

자녀들은 그 모습을 싫어하면서도 본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올바른 본을 통해서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신과 “돈”이라는 신에 의해 지배되는 오늘의 사회 속에서

부모가 바른 본을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의 자녀도 그 “돈”이라는 신들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세울 때

오늘의 이 거짓 진리와 유혹이 많은 세속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른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고

나아가 이런 그리스도의 가정을 통해

혼돈 속에 빠져가는 사회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건강한 가정,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자녀들에게 스스로 본이 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2) 자녀를 위한 기도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드릴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당연히 자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자 어거스틴의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모니카는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위한 그 어머니의 기도의 눈물이

자식이 죽었을 때 흘렸던 눈물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

훗날 성자 어거스틴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인 1849년의 어느 주일 오후,

또 한명의 어머니가 자신의 외아들인 허드슨 테일러의 구원을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지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들인

허드슨 테일러가 회심하게 되는 기적과 같은 응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내지 선교의 물꼬를 튼 결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중국선교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참조-인터냇 검색)

이처럼 자녀의 구원을 위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이며 

언젠가는 응답될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부모들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가 두 번째로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은 구원받은 자녀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 받는 일생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자녀를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또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면 기업인이나 정치가나 과학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쓰임 받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우리 아이를 복 주세요”와 같은 습관적이고 막연한 간구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자녀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을 감동하도록

부모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릴레이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주자에게 바턴을 빠르게 정확하고 넘겨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앞선 주자가 바톤을 들고 잘 달렸을지라도

다음 주자에게 제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실수하면

그동안의 경주가 헛수고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의 많은 것으로 남겨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을 아는 지식, 믿음을 남겨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가장 값진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이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딤후 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이 땅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짐을 덜어 주시며 참된 위로를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먼저 부모 된 우리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모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본이 되는 부모들로 인하여 

자녀들이 건실하고 화평한 가정들을 인하여 교회가 성장되기 원합니다.

경건한 부모들로 인하여 우리의 자녀 가운데서

요셉과 다니엘과 에스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귀한 부모를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부모는 귀한 자녀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래야 합니다.

자녀들은 주께 하듯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준 사랑에 감격하며

자녀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자손으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순종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가정마다 

승리,건강,화평과 희락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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