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범죄의 온상인 아르헨티나의 빈민촌 입니다 한인촌 근접 동네의 14살 소년이 오토바이 강도에게 총을 맞아 식물인간이 되는데 이 소년은 할머니와 같이 길을 가다가 한인 할머니의 가방이 강탈당하는 목격자로 강도에게 머리에 총을 맞습니다. 옛말에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위해 3번 이사를 한다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이 인접 지역엔 한국인 학교도 있는데 이해가 안됨니다..
♣ 내 마음에 새기는 말 ♣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마 26:74). 한 주교가 하루는 지난 주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며 집 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매우 불쾌했던 한 사건이 떠오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그의 교구 사람이 그 성직자답지 못한 언사를 듣고는 그에 대한 큰 불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혼자 은밀히 불경스런 말을 뱉는 경우로서 많은 정직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큰 시련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주님께 얼마나 불명예가 되며 우리의 삶에 얼마나 불결한 것인지 아는 가운데 이 가증스런 습성의 압박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습성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모든 노력은 아무 열매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불미스런 언어는 보통 혼자 있을 때(혹은 혼자라고 생각할 때)나 신경이 매우 날카로울 때 튀어나옵니다. 때때로 그것은 쌓인 분노나 좌절감이 자연스레 표출된 결과입니다. 위의 주교의 경우에 그것은 무시당한 기분이 자연스레 돌출된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은밀히 저주를 퍼부은 것에 대한 고민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근심케 하는 것은 언젠가 그 말이 공개적으로 스미어 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잠이 들었을 때, 혹은 병원에서 마취상태에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불쑥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오랜 습성이 예수께서 심문을 당하시던 날 밤 베드로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갈릴리 예수와 동행한 사람이라는 지적을 받자 저주하며 맹세를 했습니다(마 26:74). 그는 평탄한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으며, 그는 구원받기 전에 흔히 내뱉었듯이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최선의 동기와 정직한 결단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은 우리가 생각할 기회를 갖기 전에 튀어나옵니다. 그것은 경계할 틈도 없이 완전히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골리앗을 물리치는데 늘 실패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시험과 마찬가지로 이 시험에 대해서도 승리의 약속이 있습니다(고전 10:13). 첫째로 죄를 범할 때마다 그것을 자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삶의 여러 가지 난관들을 안정됨과 고요함으로 반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때때로 다른 신자에게 잘못을 고백하는 행위가 그 완고한 습성을 깨뜨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끝으로 우리는, 다른 이들은 이 땅에서 그 말을 듣지 못할지라도 우리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그 말을 듣고 계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 우리에게 큰 보호막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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