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하시는 님!
제가 늘 읽는 아주 좋은 유태계의 철학자 세네카의 글을 나누고쟈 합니다 진솔한 친구가 1명도 없다고 자신있게 대답한 사람도 있담니다. 제가 말하는 진솔한 친구는 가족을 뺀 숫자가 아니라 배우자와 부모,형제까지도 포함한 숫자입니다. 정겨운 대화나 일상생활의 삶의 진솔한 대화를 나눌수있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 아르헨티나에서 본 제 경험으로는 가족을 포함해서 단 1명도 솔직히 자신의 어려운 고민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현실 입니다.
제가 자라던 그 옛날과는 너무 바뀐 세상입니다. 인생 여정 가운데 손 쉽고 가벼운 친구는 늘지만, 진솔한 얘기나 살아가는 얘기를 나눌 친구는 힘이든 세상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예지와 덕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먼저 가정하고,
여기에 제기한 순서에 따라 문제를 다루어나가려고 한다.
우선 예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예지의 모든 작용을 개설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선한 생활,
인류의 행복에 관련된 것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예지란 올바른 오성을 가르킨다.
즉 선과 악을 엄격히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분명히 가리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물의 가치를 토대로 한 판단력이며,
결코 일반 여론에 따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힘의 조화가 무엇인지 알고, 결단을 내리는힘을 소유한 것을 말한다.
예지는 우리의 언동을 주시하고 자연의 영위에 대해 명상하며,
우리로 하여금 행운과 불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초연하게 한다.
예지는 크고 넒어 이를 움직이려면 광대무변한 장소를 필요로 한다.
예지는 하늘과 땅을 모색하고,
이를 위해서는 과거와 미래도 초월하며,
과도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을 함께 포함한다.
예지는 그때그때의 모든 상태를 검토한다.
“현재는 어떠한가. 언제부터 시작하여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마찬가지로 그 마음도 검토한다.
“어디서 온 무엇인가, 언제부터 시작하여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어느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지는않는가.
그리고 일정한 형태로만 봉사하는가,
아니면 그 마음은 우리에게서 떠나 방황하는가.
우리와 떨어져 있다면 어디에 있으며 어떤 행동을 하는가.
마음은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자신을 의식하는가”
이것이 곧 완전한 마음의 실체이며, 인간의 완전한 상태다.
자연이 이끌 수 있는 최고의 지점에 인간을 가져간 상태다.
이것이 철학이 아니다. 예지와 철학의 차이는 욕심과 돈의 차이와 같다.
하나는 원하는것이고 하나는 원하는 대상,
즉 하나는 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다.
예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물을 볼 때의 시력이나
웅변을 토할 때의 연설 같은 것이다.
완전한 예지를 갖는 것은 완전한 행복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로 예지의 발동으로 우리는 생활을 안락하게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날마다 명상을 되풀이하여 마음속 깊이 새겨서 우리의 의지를 굳게하여
선한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실천해야 한다.
철학은 결코 남에게 자랑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철학은 말로 주장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해야 한다.
예지를 위한 철학은 단지 환락을 위한 향연이 아니며
권태를 몰아내기 위한 취미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며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해서 는 안 되는 일을 가르쳐 준다.
부모에게는 효도를, 친구에게는 신의를, 가난한 자에게는 자비를,
혼란에 대해서는 판단을, 이 모든 우리의 의무에 대해 예지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탐내지 않으며,
따라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도록 인도한다.
예지를 지닌 현인이 그 의무를 수행하려고 할 때,
세상에 이를 막는 역경이란 있을 수 없다.
순탄한 환경에서는 자기를 억제하고 역경에서는 역경 자체를 지배한다.
재물을 소유할 경우에는 그 재물로 자기의 덕을 기르고,
재물이 없으면 가난으로 덕을 기른다.
만일 자기 나라에서 덕을 기를수 없으면, 유적지에서 덕을기른다.
장군이 되어 부하에게 명령을 내릴 처지에 있지 않더라도
한 병졸로서 자기의 직분에 항상 충실한다.
세상에는 맹수를 길들이는 묘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
사자를 껴안는다거나 호랑이에게 입을 맞춰 보이고
코끼리에게 절을 시켜 보이기도 한다.
극도의 역경에 빠진 현자도 이 맹수를 길들이는 자와 같다.
즉 그가 어떤 맹수라도 얌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현자는 어떤 역경도 상냥하고 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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