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사책에 보면
배재학당을 짓고 있는 장면이 담긴 흑백사진 한 장이 실려 있습니다.
그 곳에서 공사를 하는 검은 옷을 입으신 분이
바로 우리나라에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선교사님이십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연맹 모임에서 만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는 어느 날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자기의 삶을 조선민족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다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도착하는 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하지만 입국부터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했지만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양과의 수교가 맺어진 뒤였지만 아직은 서양의 목사가
그것도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온다는 것은 쉽게 허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정도 해보고 갖은 노력도 해보았지만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동안 일본으로 돌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선교사님은 알렌공사에게 사정한 끝에
광혜원 안에서 일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조선 입국이 허용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당시 총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나마 받아준 모양입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아펜젤러 선교사님 부부는 같은 해 6월 21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시는 존 헤론 선교사님이 아내인 해티와 함께
조선 땅을 밟을 때 같은 배로 들어오십니다.
아펜젤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날도, 아펜젤러 선교사는 집회를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습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 타고 있던 배가 파선하게 됩니다.
그 때 조선 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아펜젤러 선교사는
즉시로 물에 뛰어내려 그 소녀를 구해줍니다. 그가 소녀를 건지고 ,
힘이 빠져, 지친 상태로, 겨우 배에 메달려 있을 때,
다시 큰 파도가 덮치면서, 파도에 휩쓸리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40세의 짧은 생,
마지막까지 조선 소녀,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 바치고 가셨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이고,
그가 세운 학교는 긴 역사를 자랑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배제 중 고등학교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었던, 선교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엘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조선을 이해하고 자기가 조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엘리스는
이 땅에 여성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화여대 학장을 지내면서,
지금 신촌의 이화여대 학교부지와 건물을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대 최초 한국 학장인 김활란 여사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방황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조선 사랑하는 가슴을 깨닫고,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아, 아버지가 세운 배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게 됩니다.
그는 6. 25 전쟁 때 우리 민족을 위해,
세계 많은 국가와 교회에게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실정을 전해 주면서,
춥고 배고픈 이 민족에게 수많은 구호물품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 선교사는 아버지가 못 다한 그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병들어 미국으로 치료차 가면서
"내가 죽으면 절대로 미국에 묻지 말고 조선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간절히 조선에 묻히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좋은 일하러 가신 우리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지낸 사춘기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에 머물며 선교사역을 하면서,
죤 헤론의 죽음으로 얻게 된 땅,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선교사님들이 묻힐 때 마다 오게 되면서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 아펜젤러 선교사를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사님은 무덤이라도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목포 앞바다에서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도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꼭 한국 땅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유언 중에 이런 유언이 있습니다.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맞은편에는, 1950년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다 순교한,
그 의 누님, 엘리스가 묻혀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님 가족의 숭고한 희생의 삶은,
우리 민족에게 큰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이런 선교사님들의 희생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_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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