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연’
나무 아래서 구워먹는 육적의 맛
자 연 속에서 자리를 깔고 고기 구워 먹는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별미인가 보다.
소나무 아래서 기생과 함께 육적을 구워 먹으며 풍류를 즐기는 양반들의 상황,
그야말로 ‘들판에서의 연회’다.
조선 후기 서울의 세시풍속을 묘사한 <동국세시기>에서 저자 홍석모는
‘야연’을 보며 “요사이 한양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훨훨 피워놓고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간장, 계란, 파, 마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며
조리법을 소개한 바 있다. 육적은 평민들은 평소에 맛도 못 볼 귀한 음식이었다.
당시 소는 농사에 꼭 필요한 동물로서 왕실에서는 소를 잡지 못하도록 하는
도살 금지령을 내렸다(1763년, 1854년, 1910년).
그러나 일부 양반들은 제사에 쓴다는 이유로 몰래 소를 잡곤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인 걸까?
도살 금지령과 금주령 속에서도 숯불에 노릇하게 구운 육적과 술을 즐기는
양반들의 표정이 그저 즐거워 보이기만 하다.
‘수운엽출’
고된 농사일도 즐거워지는 새참
이 슬이 내리는 새벽에 나왔는데 어느덧 해가 정수리에 와 있다.
곧 새참을 먹으며 조금 쉬겠거니 싶은 안도감이 느껴진다.
고된 노동 끝에 먹는 새참은 그야말로 꿀맛일 테다.
요새는 기계로 논을 갈고 제초제와 농약으로 잡초와 벌레를 쉽게 없애지만
그런 것이 없던 조선 시대에는
오직 소와 사람의 노동력으로 벅찬 논일을 해내야 했다.
틈틈이 새참을 챙겨 먹는 것도 체력적으로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이다.
봄부터 이른 여름까지 농사일이 한창 바쁜 때에는
밥 공기 가득 하루에 세 끼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그럴 때 새참은 든든한 에너지원이 된다.
새참 바구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막걸리. 걸쭉한 막걸리를 반주 삼아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곁들여 상추에 싸 먹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여기에 소금으로 간한 짭짤한 생선찜이라도 반찬으로 마련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국수 누르는 모양‘
살얼음 동동 떠 있는 차가운 메밀국수 한그릇
줄 을 잡고 널빤지에 걸터앉은 남자가 열심히 면을 뽑고 있다.
그림을 눈여겨 살피면 널빤지 아래의 작은 구멍을 통하여
실처럼 가는 국수가 물이 끓는 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국수는 메밀로 만든 것이었으리라.
밀은 추운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토양과는 맞지 않는다.
메밀 반죽은 얇게 밀어서 채를 썰거나(칼국수) 손으로 떼어내지만(수제비)
냉면이나 막국수처럼 가느다란 국수를 만들 때는 국수 틀을 이용한다.
양지머리를 푹 끓여낸 육수에
살얼음 동동 떠 있는 동치미 국물을 섞은 냉면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편육을 올린 메밀냉면 한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군침도는 음식이다.
'주막' 배고픈 나그네를 위로하는 푸짐한 국밥
돗 자리를 깔고 토방을 세워 만든 주막은
주머니 가볍고 배고픈 나그네들이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주모의 넉넉한 마음이 스민 곳이다.
부여잡은 탕 그릇을 기울여 밑바닥에 남은 국물까지 싹싹 긁어 먹는
나그네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국밥은 커다란 무쇠솥에 소머리와 뼈, 껍질, 우족 등
여러 가지 소의 부산물을 넣고 푹 끓여 만든 영양 가득한 음식이다.
이 국물을 따로 퍼 담아 간장과 고춧가루로 간을 한 뒤
콩나물이나 고기, 파 등을 올린 다음 김치를 곁들여 밥을 말아 먹는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저자 이용기는
“국이 없으면 얼굴에 눈이 없는 것 같고
온갖 잔치에서 국이 없으면 못쓴다”고 이야기했다.
같은 양의 고기가 있더라도 구워 먹기보다 국물을 우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국의 미덕이다.
이런 국에 밥을 만 국밥은 배고픈 나그네가
짧은 시간 동안 밥과 국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간편한 음식이다.
그릇은 모두 징광옹기 제품이며 한복은 김영석 전통한복 제품이다.
'강상회음' 어부들이 강가에 모이는 이유 숭어찜
강 가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평화로운 이 그림은
조선 후기 때 활동하던 신윤복, 김홍도와 함께
3대 풍속화가인 김득신의 작품이다.
큰 생선 한 마리를 가운데 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표정은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림 속의 생선은 숭어를 닮았는데,
바닷물고기 숭어가 산란을 하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음력 4월만큼은 강가에서도 숭어 요리를 즐겼을 것이다.
그림에 나오는 숭어는 색깔이 그을리지 않고
모양도 흐트러지지 않아 쪄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숭어를 깨끗하게 다듬은 다음 소금으로 간하여
그늘진 곳에 하루 동안 말리면 살이 꾸덕꾸덕해지는데
이를 찜통에 넣고 약한 불에 익히면
간이 짭조름하게 밴 숭어찜이 된다.
숭어를 담은 큰 접시와 막걸리 잔, 주병은 징광옹기 제품.
백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이다.
‘회혼례첩’
60년 전 시집올 때 받았던 잔칫상을 다시 대한다
의 료 기술이 발달하고 위생 상태가 좋은 요즘이야
60세 넘은 이들이 많지만,
조선 후기에 60세를 넘기는 것이 잔치를 할 만큼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결혼한 60주년에 여는 잔치인 회근연은 그야말로 자손 대대로 큰 경사다.
혼례를 올릴 때 신랑과 신부는 마주 서서
각각 술 석 잔을 따르고 세 번씩 마시는 근배례를 올린다.
회근연은 근배례를 올린 지 60년 만에
두 부부가 마주 서서 다시 술잔을 올리는 예식이다.
달라진 것이라곤 근배례 후 자식과 손자들이 술을 올리는 순서가 더 있다는 점이다.
부부 앞에는 붉은 옻칠을 한 원반이 하나씩 있고,
원반 양옆에는 검은 옻칠을 한 호족상 두 개가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구성한 상을 ‘큰상’이라고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조차도
혼례나 회갑, 회근과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만 큰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붉은 원반에는 팥으로 만든 시루떡을 괴임으로 놓고,
콩가루 고물을 묻힌 인절미를 넉넉하게 올린다.
백자 주발과 보시기에는 정성스럽게 만든 갖가지 반찬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또 원반 양옆의 호족반에도 정과나 편육, 국수, 반찬 등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상 곳곳에 장식된 붉은 상화는 오늘날의 센터피스 기능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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