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출처는 전라도 닷컴이고,전직 은퇴하신 교장 선생님의 봉사 수기이다.
필자는 아르헨티나 동포로 내가 사는 나라를 러시아와 비교해 볼 때에
감사와 고마움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다.
나와 우리 가정을 잘 살게 터전을 마련해준 나의 제2 조국 아르헨티나!
코 딱지만한 땅?..우리 나라의 위정자들은 정말 정신을 차릴 때 이다.
개뿔도 없는 자들이 큰 소리 펑 펑?...한심한 마음이다.
아리랑 병창-갑돌이와 갑순이
후원관련 문의: 고려인문화농업교류협력회(062-228-2999)
러시아 혁명 후,백러시아인 인종 차별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죽음의 강제이주 후 다시 연해주로 쫓겨난 고려인들
조국에도 러시아에도 속하지 못한 고려인들.
그가 맞닥뜨린 고려인의 현실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 통치하에서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우즈베키스탄)로
죽음의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리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60여 년 세월 흘러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면서
다시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결국 6000km나 되는 머나먼 길을 돌아 처음에 살던 연해주로 다시 모여드는데
이 과정에서 집이며 직장 등 그동안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겨울이 6개월이나 지속되며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군부대가 버린 막사에 살며 추위와 질병,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순식간에 러시아 최극빈층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가 자원봉사단을 긴급히 꾸려 재방문을 했을 때,
그의 손엔 각 집에 나눠 줄 쌀 40kg 푸대들과 후원금 2만달러가 들려 있었다.
쌀을 살 수 없어 한 조각의 빵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의 반응은 눈물겨웠다.
“대단했죠. 한 부부는 한숨도 안 자고 밤새 쌀섬을 타 넘으며
‘이것이 진짜 우리 것일까, 꿈 아닐까’ 했다더라고.
괜히 내 맘이 찡하고 그냥 고맙고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
다음 해 다시 방문할 때에는 옷이며 신발, 이불 등 생필품을 두둑하게 챙겨
길을 나섰다. 혹한 속에서도 변변한 이불 하나 없던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의 씨앗과 호미도 챙겼다.
6개월이 겨울인 곳에서 농사 짓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부지런한 민족성은 사라지지 않아서
건너간 자원봉사자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돌나라 한농복구회’에 가입해 익혀두었던 농사법이 귀중하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농업에 필요한 농기구며 농법을 알려줄 자원봉사자를 상주시키며
물심양면 그들을 도왔다.
자원봉사자들은 낮에는 농사를 돕고
밤에는 고려인 2·3세대에게 한글, 사물놀이, 한국무용 등 민족문화를 가르쳤다.
결국 일을 시작한지 6년 후 빠르치잔스크에 140평 규모의 ‘고려인문화회관’을 건립하고
고려인 후세들에게 정기적인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들었던, 그저 부모의 고향 나라라고 여겼던 조국이
따뜻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부활한 것이다.
요즘에는 집수리 등 환경 개선과 아이들 교육프로그램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식생활 사정은 조금 풀린 덕분이다.
“배우고자 하는 열정들을 보면 말로 다 못해요.
모두 눈빛이 초롱초롱 의욕이 대단하고 한글을 배운다는 일에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기 애들은 그 절박함을 모를 거요.”
재작년부터는 모국방문 사업을 시작하였다.
‘죽기 전에 꼭 한번 고향산천을 보고 싶다’는 고려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어서이다.
“모두들 좋아서 어쩔 줄 몰라요. 그분들에게 조국이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니
나도 참 좋아요. 우린 한 민족이잖아요.”
이 일을 해오는 동안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자원봉사자를 찾는 일과 재원 마련이었다.
어렵사리 모은 후원자가 현재 100여 명.
그동안 농사 지을 트랙터 3대와 마을버스 구입, 문화센터 건립 등에 들어간
뭉칫돈도 해결해야 하고, 앞으로 진행될 모국방문 비행기삯, 체류비 등에도
상당한 예산이 필요한 실정이다.
그가 모국방문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의료혜택도 못 받고 병으로 죽어가는 고려인들에게 수술을 시켜주어
살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국적 없는 고려인들에게 ‘아프다’는 바로 ‘돌아가셨습니다’로 이어진다.
국적 때문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결국 병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병명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4년 입국하여 수술을 받은
서 로냐 블라디미르비치(68)씨도 모국 방문을 통해 목숨을 구했다.
병명은 ‘복부 대동맥질환’. 세 겹인 동맥중 이미 두 겹이 파손되었고
나머지 한 겹의 혈관마저 늘어나 있는 실정이었다.
이 혈관마저 터지면 그대로 사망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사연을 곳곳에 전한 결과, 전남대병원에서 무료수술을 할 수 있었다.
“고국에 간 것만으로도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병까지 고쳤으니
이 빚을 어찌 갚을 것이요. 조국에 큰 빚을 졌소.”
서 로냐 할아버지는 러시아에 돌아가서도 연일 그 말씀이라고 한다.
빠르짜잔스크 '고려인문화회관' 의 한글교육.
아픈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기억
오채선 회장에게 이 일이 왜 필요한지, 꼭 고려인이어야 하는지 물었다.
“고려인들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러 연해주로 건너 간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이요.
그들의 투쟁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인데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우리가 그들에게 빚진 건데.”
연해주에는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살고 있다.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신우여 장군, 최재형 선생 등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인물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은 그들을 기억할지 모르나
그 후손들의 삶은 관심 밖으로 아주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손녀를 만난 것도 리어카의 떡 가판대 앞이었고
홍범도 장군의 손녀 역시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최재형 선생은 어린 시절 연해주로 밀항해서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 돈 모두를 독립자금이나 인재양성, 한인학교 설립에 남김없이 썼다.
1962년 조국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그의 11명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기울이지 않았다.
‘고려인문화농업교류협력회’는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 신우여 장군 후손들의
모국 방문을 추진하였고,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하였다.
사연이 알려지자 보훈청에서 연락이 왔다.
서류만 만들어지면 보훈연금 지급이 가능하다는 소식이었다.
“조국을 위해 살았던 분들에게,
그 후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보탬이 되는 게 보람이죠.”
인천에서 연해주까지 비행기로 걸리는 시간은 2시간30분.
그러나 그는 18시간 걸리는 배를 타고 연해주로 향한다.
1인당 짐 무게를 제한하는 비행기로는 챙겨 갈 많은 짐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감수한 일이다.
올해 오채선 회장의 계획은 ‘죽기 전에 고국땅 밟기’가 마지막 소원인
고려인들의 바람을 작년에 이어 또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먼 훗날엔 ‘고려인 마을’까지 건설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우리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쓰라리고 아픈 역사가 있고,
그 뒤안길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날 다시 그들에게 따뜻한 손 내밀어 함께 살아가자”는 오채선 회장.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라는 러시아의 겨울을 나는 고려인들에게
그는 오늘도 남쪽의 훈풍을 불어보내고 있다.
박지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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