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5 : 17절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낭송 : 선우승국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 보세요.
인생 나그네 길엔 번뇌와 고통이 늘 동행을 합니다.
*필자의 포스팅으로 인해 오해와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포스팅은 특정인과 상황을 지목하진 않는 일반적인 것 일 뿐 입니다.
더 많은 번뇌와 고통을 깨우친 분들이 더 지혜롭습니다.
더 큰 번뇌와 고통을 이겼던 사람이 더 강합니다.
더 깊은 마음의 아픔을 지나왔던 사람의 시선이 더 깊습니다.
이야기 1 : 싣달타 부처님은 출생 1주일 만에 어머니를 잃었죠.
이모가 그를 키웠습니다.
싯다르타는
'나로 인해 엄마가 죽었다'는 자책감을 느낄 때도 있었겠죠.
어쩌면 인도의 밤 별을 헤며
숱하게 "엄마!"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경전에는 그가 어릴 적부터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남달리 깊은 눈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야기 2 :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목수였던 요셉은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었죠.
예수가 살았던 나자렛의 동네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동정녀의 아들'
혹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진 않았겠죠.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유년기의 예수 그에게 출생의 비밀은 큰 짐이 아니었을까요.
이야기 3 :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노나라 하급 무관이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이 있었죠. 딸은 많았으나 아들은 하나였죠.
그 아들이 너무 부실했답니다.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대가 끊길까봐 우려하던
70세의 공흘은 16세 처녀 안징재를 맞아들였죠.
나이 차이만 54세였습니다.
그리고 공자를 낳았죠.
공자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스물네 살 때는 홀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야기 4 :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유복자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여섯 살 때는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양친을 잃은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여덟 살 때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죠.
그래서 숙부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상인이었던 숙부를 따라 험난한 사막을 횡단하곤 했죠.
나 뿐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 합니다.
내 삶에 번뇌와 고통이 나를 모아칠까봐
내 가슴에 아픔이 박힐까봐 겁을 내는거죠.
그런데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 창시자들의 유년기에는
상당한 고통과 번뇌가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 대한 결핍감을 안은 채
어릴 적부터 '인간의 삶 인간의 죽음'을
피부로 절절하게 느끼며 자랐을터이까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인생에 "그게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그럼 종교적 깨달음을 위해선
'힘겨운 유년기'가 필수적인 조건인가?"
그러나 문제의 관건은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나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 아닙니다.
그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거죠.
핵심은 이들이 가졌던 '고통과 번뇌'라는 형상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삶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죠.
번뇌의 형상은 엉킨 실뭉치와 같습니다.
그걸 한올씩 한올씩 풀면서 우리는 이치를 터득하는 겁니다.
나와 상대 이런 세상…삼라 만상에 대한 순리를 말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혜가 성장하는 겁니다.
그런 지혜의 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한담니다.
엉킨 실뭉치와 같은 번뇌와 고통이 없다면
지혜를 구할 기회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겁 내지 마세요.
"번뇌여! 오지 마라"
"고통이여! 저리 가라"
"아픔이여! 오지 마라"며 두려워 하지 마세요.
위 이야기 속의 성자와 현인은 말씀을 합니다.
번뇌와 고통 속에서 지혜의 등불을 켤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각 종교의 창시자들도
그렇게 내 마음을 깨우친 이들입니다.
결국 번뇌와 고통은
우리 인생 나그네 길을 안내를 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지혜를 찾도록 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힘을 내서 헤쳐 나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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