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 촌노는 블로그에 장황설의 예수님 운운..하며 방문하시는
정체 불명의 스크랩 전문 블로거들을 반기지 않습니다.
예수교인이면 직접 체험한 일상의 코람데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또 블러그의 댓글에는 답글이 없는 사람들도 안좋아 합니다
자칭 목사,선교사,전도사,장노,권사.. 운운하는며 너절한 글로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더럽히지 마세요.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긴 글을 모셨으니 읽어보시고 주님 앞으로 새롭게 나오세요.
Shortcut to Find Easy Way of Mission is the Way of Failure
나는 많은 선교 헌신자들이 지름길을 택하여
조급하게 선교지로 떠나려는 유혹에 빠져
결국은 실패한 선교사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선교를 더럽히고 있는 것을 본다.
필자는 힌국에서 파송되거나 선교비 후원을 받는
선교사나 목사를 만나 그들의 선교 살적을 들은 적도 많고,
또 우연치 않게 이들이 션교지로 택한 곳의 현지 원주민도 만나는데
한 사람은 나의 절친한 친구로 그들의 선교 일을 알게 된다.
이들은 미치 선교자로 일부 지역을 전부 복음화한 일로 과장한다.
사기꾼의 길로 들어 서는 죄악을 범하는 일이다.
여러 교회와 선교 단체의 선교지원금은
큰 돈벌이 수단이 되는 걸 보고
또 이들은 계속 현지 한인 교회에 손을 내밀며 동냥을 한다.
무당 굿 보다는 제밥에 걸신이 들린 자들인데
이런 자들 중에는 현지 한인 교회 담임 목사로 자리를 잡은 자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후진 곳엔 토종 원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400여년 전에 카토릭의 전도를 경험한 사람들이고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와도 반대나 적의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토속 종교인 땅의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로
천주교는 토속 종교를 흡수한 이상한 종교 의식도 한다..
물론 천주교 신부는 토속 종교의식엔 불참을 한다.
한 10년 전 일인데,현지인 전도한다는 목사가 나팔을 부는데,
이 자는 정말 황당한 사깃꾼 목사이다..
거의 20년 넘게 한국 여러 교회와 선교 던체에서 선교비를 받은 자이다.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자립한 선교 성공 목회라고 떠벌인다.
이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선교 헌신자는 결코 조급하게 서둘러 쉬운 길을 택하여
선교지로 나가서는 안 된다.
잘 짜인 선교사 훈련과 교육을 받기 위하여 충분한 기간을 가져서
널리 공인된 훌륭한 파송 선교단체가 인정할만한 수준의 자격을 이룬 후에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떠나야 한다.
I. 쉬운 길은 낙담과 절망(lose heart and despair)으로 가는 미로(迷路)이다
충분한 준비와 잘 짜인 교육을 거치지 않고 조급히 서둘러 쉬운 길을 택하여 나가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유혹과 오류와 고생과 낙담과 절망의 미로들은 다음과 같다.
I. 열악한 환경과 풍조의 숲(bad climate woods)이 기다린다.
선교지란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곳은 선하고 의롭고 참된 것과 올바른 것들이 선교사를 기다리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이방적이고 야만적이며 악마적이고 악하고 추하고 어지럽고
거짓된 것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세속적인 것과 속이는 것과 거짓이 기다리다가 준비 없는 선교사를 영접한다.
언어도 문화도 풍습도 모르는 준비 없는 선교사는
도착하자마자 악한 풍조와 거짓이 판치는 환경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선한 친구보다 거짓된 친구가 모여들고 올바른 길보다 잘못된 길로 유혹한다.
쉽게 성과를 거두려는 조급함을 아는 그들은
정상적인 선교 활동보다 비합법, 비정상적인 선교활동으로 들어서게 만든다.
정상적인 선교사들을 멀리하거나 비난하거나
그들의 선교사역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치기 시작한다.
자기의 무자격을 감추기 위하여 허세를 부리고 고귀하고 훌륭한 선교사로 위장한다.
2. 오류의 첩첩산중(mistake mountain)에서 방황하고 유리(send others round about)하게 된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과 풍조에 휘말리게 되면
계속하여 잘못된 일을 저지르게 되고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유리하고 방황하며 우회된 길을 계속 떠돌게 된다.
결국 꼭 같은 무자격 선교사를 또 불러들여 짝을 이루고 무리를 형성하여 정상적인 선교사역을 방해하고
남이 하는 일을 모방하다가 실패하고 서로 경쟁하다가 싸우고 헤어지고
또 다른 패거리를 만들어서 악한 세력을 만들어 선교지를 어지럽게 만든다.
3. 고생과 난관(hardship crossing)만 계속되고 열매는 없이 허송세월만 보내게 된다.
거짓 선교보고를 일삼다가 후원자들은 감소되고 경제적 고난 때문에
선교사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사업에 손을 대게 된다.
고생은 계속되고 경제적 실패와 선교사역의 난관만 갈수록 심해진다.
이렇게 고생과 난관이 심해지면 인간성마저 상실하게 되고
선량한 선교사들의 앞길에 올무를 놓고 선교의 거침돌과 장애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4. 무기력과 냉담의 거친 광야(apathy oasis)를 헤매게 된다.
선교의 열정이 사라지고 악과 거짓에 포위되어
선교의 거침돌로 전락한 선교사의 결국은
무기력한 인간으로 외국의 거친 광야에 버림 받아
냉담자로 세속적 인간이 되어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만다.
낙담의 늪에 빠진 인간은 어떤 악마적 행위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들의 결국은 소망 없는 인간으로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5. 인생 황야의 함정(stay swamp)에 빠져
절망의 언덕(hopeless hill)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환각과 공상으로 시작한 쉽고 안이한 선교사로서의 출발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쉬운 길을 택하였던 선교사가 그래도 완전히 버림 받지 않는 경우는
중간에 샛길로 빠져 평범한 평신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극히 드문 몇 안 되는 인내 깊게 노력한 사람들만이 중간에 돌이켜
선교의 정상적인 훈련을 받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본격적인 선교사로 성공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많은 경우는 결국 인생 실패와 패망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길을 가게 된다.
II. 쉬운 길을 택하는 실수를 막기 위한 교회와 선교단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1. 준비 없이도 도움 없이도
선교사로서의 길을 떠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매우 많다.
보내는 교회도 그런 착각에 빠지기 쉽다.
잘 짜여지지 않은 아마추어식 선교단체들도 그런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2. 쉽게 시작하고 조급히 떠난 선교사들의 실패를
어떻게 때늦지 않게 구출해 낼 수 있을까?
가장 쉬운 길은 그렇게 떠났던 선교사가 때늦지 않게 자기 실수를 깨닫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럭저럭 지내노라면 그런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새 출발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3. 가장 바람직한 길은 파송한 교회나 선교단체가 신속하게 준비 없이
조급하게 아무렇게나 떠난 선교사들의 위험과 실수를 파악하고
다시 불러들이는 길이다.
가능하면 떠난 지 일 년 이내에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늦어도 2년 내에 소환하여 재교육을 받게 하여야 한다.
4. 준비 없이 쉽게 떠났다가 쓴 맛을 보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선교사 후보생으로서의 재교육을 받게 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듣는 강의마다, 읽는 교과서마다 구구절절 중요하고 절실한 가르침인 것을 깨닫게 된다.
5. 이러한 사실은 나의 선교사 길러내기 40년의 경험에서 수없이 겪은 일들이다.
몇 년 전 GMS의 MTI에서 강의를 부탁받았던 때의 일이다.
- 그 훈련원의 훈련기간은 12주간이라는 짧은 것이다.
그런대도 수강하는 후보생들은
그 짧은 기간이 견디기 어렵게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듣는 강의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게 여겨지고 귓등으로 흘러 넘기기 일쑤였다.
- 강의하는 나는 매우 귀중한 사실과 중요한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듣고 있는 그들은 나의 강의 시간이 속히 끝나기만을 고대하는 것 같았다.
- 그들의 마음은 이미 선교지에 가 있고
그곳 선교지에서의 새롭고 놀라운 일들만 꿈꾸고 있는 것이었다.
- 그래서 열두 주간이라는 이 훈련기간이
자기들을 공연히 붙잡아 두는 불필요한 기간으로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 그들은 단지 자기가 소속된 교단의 선교부가 요구하는
훈련을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 나는 그래서 몇 차례 그 훈련원의 강의를 계속하다가
그러한 조급증에 걸린 선교후보생들을 위하여 나의 소중한 강의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적인 통과의례로서의 훈련과정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로서도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할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고 훈련원 책임자에게 말했다.
- 그는 나에게 선교지에 갔다가 2년 만에 돌아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기쁘게 그 일을 맡았다.
- 불과 10여 명의 수강생들이었지만 그들은 나의 강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였다.
- 그들은 바로 선교지에서 겪은 실수와 오류를 나의 강의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의 강의가 끝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개인적으로 만나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선교 초기 한두 해의 무지와 실수와 오류로 인하여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 나는 이들이 충분한 재교육과 넉넉한 재훈련 기간에 잘 짜인 과정을 거친다면
분명히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선교사로서의 기초를 닦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6. 선교지의 잘못된 풍조와 극악한 환경의 숲속을 헤매고
오류와 실수와 낙담의 골짜기에 빠졌던 저들을 구하여 내기 위해서는
조기에 다시 불러들여 충분한 재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파송교회와 선교회의 배려가 절실하다.
- 선교는 불타는 열정만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곳’과 ‘저곳’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최근에 경제계와 국제정치사회에서 ‘Road Map’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선교사야말로 ‘선교의 Road Map’이 없이 되는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
- 현대의 여행자는 반드시 여행에 필요한 온갖 정보가 필요하다.
복잡한 도로망에 대한 정보와 육상, 해상, 항공 여행에 얽히고설킨
여행 항로에 대한 정보와
기후와 풍습과 언어와 숙박과 음식에 대한 온갖 정보가 요구된다.
- 한국에도 도로마다 번호가 생긴 지 오래다.
그런대도 한국 사람들은 도로를 설명할 때 ‘몇 번 도로’라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머리가 현대적인 로드맵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7. 세계선교로 나서는 것은 단순하게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일생의 인생행로(行路)를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요한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보듯이
인간은 천국 길에서 잘못 들어서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 파송교회와 파송단체는 정확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선교 헌신자와 후보생들에게도
이 로드맵의 정확한 전수자(傳授子)가 되어야 하며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III. 처음 가는 길에는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한다.
1. 한국인의 생리 가운데 하나는 무모함(無謀: Rash)이다. 생각 없이 하는 일;
성급하게 하는 일; 분별없이 하는 일;
덮어놓고 하는 일; 무작정 시작하는 일; 앞뒤 가리지 않고 하는 일;
결과를 생각하지 낳고 착수하는 일;
이런 것들이 한국인의 위험한 생각인 것 같다.
이러한 생리가 선교 사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앞서 시작한 사람에게서 배워야 하고
처음 가는 길에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의 선교에 이런 도움의 필요를 느낀 것 같지 않다.
그야말로 무모하게 앞뒤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시작했다.
2. 1913년 한국 교회가 처음 중국 산동성 내양 현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세 선교사를 보낼 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3년도 못되어 모두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영훈은 미국으로 도망갔고 사병 훈은 병에 걸려 죽었으며
박태로는 병들어 거지가 되어 되돌아왔다.
그들을 보낸 총회가 무지했고 떠난 그들도 준비가 없이 서둘러 갔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중국 교회가 원하는 지도 몰랐다.
그들은 가장 외지고 거칠고 험한 땅에 준비 없이 도착했다.
그들은 도움을 받지 못했고 안내를 받지 못했다.
총회는 뒤늦게 이 무모함을 깨닫고 방효원 목사를 중심으로 현지 조사를 떠났다.
방효원 목사는 준비 없음과 중국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과
선교 현지 조사를 하지 않은 것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에 대한 안내와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고 총회에 보고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준비를 충분히 갖춘 후에 1919년 산동성 선교사로 떠났다.
그리고 20년 후인 1938년 자기 아들 방지일 목사를 선교사로 대를 잊게 하여
그가 1958년까지 20년 동안 중국 선교를 계속했다.
3. 알지 못하는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안내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 아무의 도움이 없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선교지로 떠나기만 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뜬소문만 믿고 떠난다. 그리고 잘못된 정보를 의지하고 떠난다.
- 도착한 후에야 자기는 전적으로 이 세계 밖의 낯선 사람이었고
단 한 사람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낯선 사회, 낯선 풍습,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언어,
방향도 알지 못하는 현실에 부딪힌다.
①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②어떻게 접촉해야 하는가?
③누군가 자기를 아는 사람은 없는가?
④나를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아무에게나 도움을 청했다가 낭패를 겪는다.
좋은 친구는 보이지 않고 거짓 친절로 유혹하는 사람들만 수없이 접근한다.
-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자기의 선교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일은
새로 선교를 시작하는 초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도움과 안내를 받을 사람을
선교지로 떠나기 오래 전부터 미리미리 준비해 두고 있어야 한다.
IV. 선교사는 보내는 교회와 선교회가 있는 것처럼
선교사를 받는 교화와 받는 선교단체가 있어야 한다
- 사도 바울은 선교지로 갔을 때
먼저 찾은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기도하는 경건한 백성들의 모임이었다.
초대교회의 선교는 항상 흩어져 사는 무리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먼저 만났다.
2. 프로테스탄트 선교 200년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란 식민지 회사가 인도네시아 섬들에 먼저 와서
자국민 백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화란 선교사들은
먼저 와있는 식민지 회사의 백인교회 교역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 영국의 식민지 회사가 인도에 와서 백인들의 교회를 세웠고
뒤이어서 보냄 받은 영국 선교사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본토인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는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 후 200년,
지금은 온 세계 어느 나라에든지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없는 곳이 없다.
따라서 뒤를 이어 시작한 한국을 위시한 후진 선교국의선교사들은
전연 교회를 모르는 복음의 불모지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보낸 선교사들이 이미 있는 교회들과
선교단체들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고립된 선교를 일삼는다면
그것은 성경의 원리로나 역사적 선교의 원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
현대 선교는 바울이 마케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초청의 환상에 따른 것처럼
선교 대상국의 교회와 선교단체의 초청에 따라야만 한다.
4. 보내는 교회(Sending Church)와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교회(Receiving Church),
그리고 보내는 선교단체(Sending Agencies)와 선교사를 받는 선교단체(Receiving Agencies)가
서로 함께하는 사역(Reciprocal Ministries)인 것이다.
이러한 보내고 받는 상관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내거나 초청하는 기관 없이 무작정 가는 일은 삼가야 한다.
- 앞으로 보내고 받는 상호간의 선교협약에 관한 문제는 계속 논하는 별도의 강의를 하게 되겠지만,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이러한 받아들이는 상대방 교회나 선교단체가 없이 떠나보낸 과오를 수없이 범했다.
그 결과는 많은 떠돌이 선교사들을 만들어냈고
현지 교회와 이미 오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단체들의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V. 선교회는 첫 선교지에 보낼 때 둘씩 짝지어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1. 예수께서 70인을 택하여 전도의 길에 내어보낼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기록이 복음서에 뚜렷하다.
첫 번 선교사 파송의 성령의 시키심을 받은 안디옥교회 역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짝 지어 보냈고,
사도시대 이후 선교사역의 역사는 이러한 둘씩 보내는 원칙이 계속된 것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2. 스탠리 솔토우는
그의 유명한 저서 <Mission at the Crossroad>에서 둘씩 짝지어 보내는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교회 1910년대 초기의 선교 역시 두 사람 이상을 짝지어 보낸 역사가 계속되었다.
1956년 한국 교회가 최초로 타일랜드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 두 사람을 보냈었다.
3.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보내는 데에는 중요한 원리가 있다.
첫째는 서로 의지가 되고 상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한 사람이 낙담하고 약해질 때 다른 한 사람은 그를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보고를 본부에 보낼 때
본부는 이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로는 두 사람이 각각 역할 분담을 함으로써 선교사역의 효과를 높일 수 있게 된다.
4. 두 사람을 함께 보내지만 한 사람은 성공적으로 선교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실패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도 있다.
- 이러한 경험은 선교본부의 선교사의 선택과 교육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한다.
- 한 사람은 중도에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올 수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많은 성과를 계속 거두면서 선교사역을 확대해 나가는 경우도 생긴다.
- 이러한 일들은 한 사람만 보냄으로 말미암아 오는 선교의 좌절과 중단의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된다.
문제는 함께 보냄 받은 선교사가 서로 의합하지 못하여 분쟁이 생기거나 갈라지는 경우에
이런 일을 수습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파송교회와 선교회가 찾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추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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