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데카르트의 일화와 부정한 정치 모리배 쓰레기 집단
지금 필자가 사는 아르헨티나는 지난 정부의 국고 횡량과
부정 부패로 국가 파산이란 위기에 처해 국제 총화 기금에
재정 지원 차관을 요청한다.
거대한 빚더미에 앉은 인기 영합주의 정책은
외채를 빌어 갚기는 커녕 이자가 원금으로 합산이 되서
이자에 이자를 갚으려고 세금과 공공요금 폭탄이 서민을 압박한다.
70년간 외채를 쓰고 한번도 갚지를 낳은 고질적인 구조이다.
노동자의 대부분은 일을 하지 않고 고용주 고발에 혈안이다.
망하는 중소기업의 원인은 노동자의 횡포 때문이란 생각이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의 해고에 골머리가 아프다..
부정한 정치인은 무지 몽매한 자들에게 인기 영합 정치를 하며
각종 명목으로 국고를 횡령한다..
나라의 경제를 파산 일보 직전으로 몰고간 지난 정권의
힌 수석 장관은 가장 빈곤한 지방의 시장 출신인데
그 지방의 건물의 화장실을 테르고폴 가짜 변기로 사기를 친다.
그래도 무지한 그 지방 시민은 이 자를 늘 선출한다.
또 전 경제 장관이란 자는 회계사 출신인데,
외채를 못갚는다는 황당한 말을 떠벌린 자이다..
남의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는데,양심이 없는 무뢰한이다.
국회에서 2019년 회계 예산 심사를 하는데..
이 자는 쓰레기 통 같은 이론만 떠벌인다.역겁다.
지금 이 나라에는 나라가 망하길 원하는 이상한 풍조의 병이
만연한다..
일은 안하고 잘먹고 잘살기를 원한다..판단이 흐린 자들이다.
노동자의 횡포에 시달린 농장주는 기백만불을 투자해서
농장주 식구들만이 농기구를 이용해 파종에서 추수 까지 한다.
완전 자동화된 첨단 농기구들이다..
이 나라는 가장 작은 기본 농장 크기가 1000헥탈인데,소농에 든다.
철하자 데카르트의 감정과 이성의 글이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데카르트는
문득 자신에게 이상한 성향이 있음을 자각한다.
사시(斜視: 사팔뜨기)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만 보면
왠지 더 친근감을 느끼고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던 데카르트는
결국 어린 시절에 한 소녀를 사랑한 적이 있었고,
그녀의 눈이 사시였음을 기억해 낸다.
사랑에 빠진 데카르트에게 소녀의 신체적 결함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의 신체적 결점을 압도하여,
사시라는 결점은 훗날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어떤 선택의 순간에 부닥쳤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받은 감정적 충격이나 상처 때문에
종종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철학의 왕자’로 군림했던 데카르트는
이 사소한 일화를 통해,
감정이 어떻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하는지 깨닫는다.
해가 슬슬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
한 청년이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공원을 청소하던 공원 관리인은
넋을 잃은 듯 힘없이 앉아있는 청년이
조금 수상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이보시오, 젊은이. 당신 누구요?"
젊은이는 힘없이 답했습니다.
"글쎄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생각하는 중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 집이 어디요? 어디서 왔어요?"
젊은이는 여전히 힘없이 답했습니다.
"그것도 잘 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관리인은 조금 강경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요? 어디 갈 데 없어요?"
젊은이는 역시 알 수 없는 말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관리인은 엉뚱한 대답만 하는 젊은이가
더욱 수상하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관리인의 미심쩍은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받았던 질문에
골몰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젊은이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였습니다.
사실 방향이 다르기는 했지만, 공원 관리인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이 질문 내용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하찮은 말 몇 마디에도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법입니다.
이유 없는 사건은 없습니다.
의미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필요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평범하게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대다수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중대한 의미와 필요가 감추어져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특별할지도 모르는 당신과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좀 더 아끼고
잘 살피도록 합시다.
# 오늘의 명언
¿Qué significa la frase de Descartes pienso luego existo?
“Pienso, luego existo”, “cogito ergo sum” en latín
o "I think, therefore I am" en inglés,
es una frase del filósofo y matemático francés
René Descartes (1596-1650),
la cual resume su proceso intelectual y filosófico
que afirma que la única forma de encontrar la verdad
es mediante la razón.
René Descartes estaba convencido de que la opinión
y experiencia común de la humanidad no eran confiables para buscar la verdad,
así que resolvió idear un nuevo sistema que pudiese librarse de ellas.
Descartes crea entonces un método que implicaba un instrumento matemático
de deducción pura que deriva de una razón absoluta proyectando
así la idea de un universo mecanístico, todo funciona como un mecanismo.
René Descartes fue aún más lejos con sus indagaciones filosóficas
de la razón afirmando que, a pesar de que todos tenemos una mente y un cuerpo,
la única certeza es la existencia de la mente (pensamiento, razón)
pues no se puede estar seguro ni que nuestro cuerpo existe.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
데카르트의 인식론
철학/인식론 2008.04.24 08:33
The Theory Of Knowledge
철학 분과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인식론(지식에 과한 이론)이다.
철학자들은 우리 지식의 범위와 우리 지식의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나 조건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의미를 발견하려 시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만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나 그것의 신뢰성에 관해서 물어보지는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수상쩍거나 허위라는 것의 증명이
확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만약 이러한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확실성에 대한 주장에 대해 의심스러워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에서 말하는 모든 뉴스가 거짓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을 가정해보자.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친구나 신문이나 우리자신까지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식론을 발전시켜온 철학자들에게
온갖 종류의 질문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 가장 풍부한 자료의 출처는
인간판단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이론이나 믿음도 없어왔다는 것,
그것을 믿고 그것에 관해 논의했던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과학의 역사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믿어져 왔던
이론과 완전히 버려진 이론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달이 돌이라고 주장하여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20세기에,
테네시 주에서의 한 선생은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처벌을 당했다.
지난 25년간 그들 사회의 통치자들의 절대 확실한 지식에 도전해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모든 지식의 기초를 결정하는 것과
이 주장들의 판단에 관한 기준을 결정하는 것을 고찰하였다.
만약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많은 것들이
거짓이나 의심스러운 것으로 증명되어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RENE DESCARTES : THE PROBLEM POSED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인 Rene Decartes는
가장 두드러진 형태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데카르트는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는 카톨릭과 위그노교 사이의 종교적인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세계의 본성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옹호자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와 갈리레오의 새로운 이론을 지원하는 자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훈련된 데카르트는 스스로 세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의 연구를 확장한 후에 그는 전통적이고 명예스러웠던
나름 권위적인 것으로 주장된 모든 받아들여진 견해를 의심하는데 이르렀다.
1628년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느낀
오래된 이론과 새로운 이론 사이의 혼란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었던, 가장 독립적이고,
사려 깊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 대부분은 확실성을 찾는데 단념하였고, 회의론으로 빠져들었다.
a. 충분하거나 적합한 증거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우리의 어떤 믿음이든지 의심한다는 견해
그러나 데카르트는 회의론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확실하기 위한,
그리고 어떤 발견도 그의 믿음을 전혀 흔들 수 없는 확실성을 강렬히 원하였다.
그는 확실성의 탐구에 절망한 사람들의 파리를 떠났다.
네덜란드로 떠난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고찰하고,
믿을 수 있는 지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것이든지 알아보라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결코 거짓이거나 의심스러울 수 없는 유일한 지식에 대해 확실할 수 있다고 느꼈다.
우리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이러한 기준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시험해보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시험(만약 그가 옳다면,)의 결과들은 너무 절망적이어서
철학자들은 지식의 기초에 대한 물음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Decartes' Test. 그들의 이론들을 시험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데카르트의 시험을 고찰해봐야 한다.
그는 그의 <제일철학의 성찰(1640)>을 쓰면서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진리라고 공인된 지식들이 거짓된 믿음들이
얼마나 많은 지와 이러한 기초에 구성되어진 모든 것들이
얼마나 의심스러운지를 발견한 이후, 몇 년이 지난 현재.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이전부터 받아들여진 모든 의견들을
스스로 제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기초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만약 내가 과학에서 견고하고 불변하는 구조를 세우기를 원하는 것처럼. . . .
그러나 이를 위해 모든 의견이 거짓임을 증명해보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내가 도저히 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성이 설득하고 있는 바는
아주 확실하지 않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거짓된 경우에서처럼 조심스럽게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의견들 가운데 하나라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의견 전체를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의견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기에,
기존의 의견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들 자체를 검토해보자.
이전부터 갖고 있던 모든 견해들을 시험할 필요는 없다고 데카르트는 느꼈지만,
-끝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믿음의 일반적인 형태를 고찰해보는 것이 날 것이다.
만약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다면
모든 범주는 의심스럽고 믿지 못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간주되어진 첫 번째 범주는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그러한 견해들이다.
내가 지금까지 아주 참된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은 모두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이제 경험하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감각적 자료의 신뢰성 데카르트는
모든 것들은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확신하였다.
누군가 거리를 두고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가까이서 바라볼 때와 분명 다르게 보이거나,
물속에 있는 것을 볼 때와 물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사람이 노를 젓고 있을 때, 노는 굽어보인다.
이러한 일은 때때로 발생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모든 경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실할 수 없다고 제안하였다.
만약 누군가는 때때로 이러한 경우를 인정하지만,
우리는 감각 경험에 매우 확신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사물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감각이 비록 아주 작은 것과 멀리 떨어진 것에 대해 종종 우리를 속일지라도,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는 것,
이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두 손이 그리고 이 몸통이 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미치광이의 짓과 다름이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 . .
[그들은 그들이 분명히 가난하다거나, 아무것도 거치지 않았는데,
귀족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거나,
호박이나 유리로 만들어진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상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확신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미쳤고, 내가 조금 더 미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다음 예를 따르는 것은 너무도 사치스럽다.(?)] - 별 신경 안 써도 되는 내용 -
그러나 아마도 데카르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의 시험이 이미 어떤 의심에 이르지 않았다면,
데카르트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나도 한 인간이다. 밤에는 으레 잠을 자고,
꿈속에서는 미치광이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짓과 똑같은 것을,
아니 종종 더 괴상한 것을 그려 낸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건만 평소처럼 내가 여기 있다고,
겨울 외투를 입고 난로 가에 앉아 있다고 잠 속에서 그려낸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지금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종이를 보고 있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이 머리는 잠 속에 있지 않다.
나는 의도적으로 손을 뻗어 보고, 또 느끼고 있다.
내가 잠자고 있을 때 이런 것은 이처럼 판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속은 적이 한 두 번이던가.
이런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깨어 있다는 것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 줄 어떤 징표도 없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런 놀라움으로 인해
내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 문제는 까다롭다.
어떻게 우리가 보는 모든 것과 꿈의 일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구별할 수 있을 지라도,
우리가 체크하기로 채택한 어떤 수단이든, 또한 꿈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꿈인지 아닌지 꼬집어보는 꿈을 꾸어왔다.
데카르트는 그것에 관해 느낄 방법이 없고,
우리의 감각 경험이 꿈의 일부가 아니라는 어떠한 보증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의 신뢰성- 정확성 - 을 의심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꿈이더라도,
누군가는 꿈의 어떠한 측면은 믿을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볼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시작하였다.
그래 좋다.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치자.
그래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 머리를 움직여 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아니 어쩌면 그런 손이나 몸통조차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잠들어 있을 때 보이는 것은 일종의 상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참된 것의 견본대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 머리, 손, 몸통 등과 같은 일반적인 것만은
적어도 단순히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현존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화가들이
사이렌이나 사티로스를 아주 기이한 모양으로 나타내려고 해 보았자,
그들은 아주 새로운 본성을 그것에 부여할 수는 없으며,
다만 다양한 동물들의 지체들을 이리 저리 뒤섞어 놓을 뿐이다.
그렇지만 혹시 그들이 이와 유사한 것을 전혀 본적도 없는,
그래서 극히 허구적이고 거짓된 어떤 것을 고안해낸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구성하고 있는 색깔만은 적어도 참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비록 우리의 경험의 특별한 내용이 꿈일지라도,
여전히 그 꿈은 자체로 어떤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
-우리자신, 의자, 테이블, 나무-은 굉장한 착각이거나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환상은 어떤 것에 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고 얘기하고,
함께 살고 있는,
특별한 사물은 계속되는 꿈 세계의 일부분일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우리는 그 꿈에 있는 사물을 우리의 꿈속에서 창조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그렇다면, 확실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창조는 확실히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코끼리는 항상 나비보다 크고, 사각형은 결코 둥근 각을 가질 수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 경험의 실제항목이 환상일 수 있다는 고찰과,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어 낸 연구(예를 들어, 천문학, 식물학, 물리학)들
또한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러한 사물이 꿈속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상상의 허구라면.
여전히 꿈의 세계는
-만약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꿈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논쟁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고,
확실히 기하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든 지간에, 2와 3의 합은 언제나 5이고,
사각형은 절대 4변 이상을 가질 수 없고,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고
진리는 어떤 거짓이나 불확실한 것으로 의심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신에 관한 질문
그러나 어떤 사람도 시험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의 지식을 의심할
최종적이고 압도적인 이유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내 정신 속에는 오래된 한 가지 의견이 새겨져 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지금의 내 모습대로 나를 창조했을 신이 존재한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땅, 하늘, 연장적 사물, 형태, 크기, 장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지금 보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저 신이 만들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또한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완전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가끔 오류를 범하고 있듯이,
나 역시도 둘에 셋을 더할 때, 사각형의 변을 셀 때
혹은 이보다 더 쉬운 것을 행할 때 잘못을 범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은 아주 선하기 때문에 내가 속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잘못을 저지르도록 신이 나를 창조했다는 것이
그의 신성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내가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신이 허용하고 있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는 신의 선성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가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는 인류를 속이는 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모든 것의 가장 비참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데카르트는 그의 시험을 결론 낼 준비를 하였다.
만약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 인도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우리는 어떤 것이든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2와 3을 더했을 때,
결론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실수를 강요받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잘못된 결론을 피할 수 있을까?
계획적인 기만의 가능성이 한번이라도 허락된다면,
모든 것은 절망에 빠질 것이고,
우리의 믿을 수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의심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결론지었다.
결국에 나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믿어왔던,
그리고 생각의 부족을 통해서나 경솔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매우 강력하고 완벽하게 고려되었던 이성을 통한 진리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만약 과학에서 어떤 확실성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명백하게 거짓인 것보다 이러한 의견을 믿는 것을 조심스럽게 그만두어야 한다.
의심 데카르트의 시험은 재앙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견해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이러한 믿음들이
거짓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거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에, 우리의 가장 소중하고 견고한 믿음들이 거짓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그럴듯하거나 그렇지 않건 간에, 이유는 제공될 수 있다.
광기와 술 취함으로 인한 감각적 착각과 환상은
우리의 감각적 정보의 신뢰도에 어떤 의심을 던진다.
“우리는 단지 사물을 보는 것일 뿐이다.”
경험의 모든 가능성은 꿈의 일부분이라는 의심
(사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상상 밖의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심)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지식의 기초에 대한 보증 없이는
악령이 우리를 속인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데카르트의 목적.
데카르트의 시험의 목적은 과학적 허구의 환상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지만,
결정적인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거짓이거나 불확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여기려고 할 것이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견의 설립 속에 어려움은 존재한다고 보이는데,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와 모든 의심에 빠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거짓일지도 모르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도록 만들었다.
대신에 그는 만족스러운 기초를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그 기초는 너무도 확실하여,
회의주의에 의해 제시된 모든 터무니없는 가정이 그 기초를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제.
이제 데카르트와 다른 철학자들이 우리 지식의 본성
(지식의 기초와 지식의 확장)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나타내었던 이론에 관하여 고찰해보자.
그들의 이론화가 고려해왔던 것을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먼저 지식의 문제에 관한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사용하는 주장의 종류는 무엇인가?
통용어(通用語) 보통의 논쟁 속에서 우리는 동사 “알고 있다.”를 막연히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의 사실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1933년 월드시리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나는 뉴욕자이언츠가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다.
데카르트의 도움 없이, 개인적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
“알고 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의 주장은 사실 기초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매우 완고한 사람들 - 사실, 매우 실수하는 - 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믿는다.”, “생각한다.”와 좋아함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 때와 같이
“알고 있다.”의 보다 더 긍정적인 사용법이 있다.
속인들이 Salk polio vaccine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사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아마도 이것은 권위 있는 어떤 사람의 견해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한사람이 묻기를 만약 스미스가 그 파티에 가게 된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이다.
이것은 단지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가 거기에 갈 계획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말하는 편리한 방식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완전한 보장을 표현하지 않지만, 확신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스미스의 계획을 들은 것을 단순한 기초로 하여
그러한 주장의 정확성을 보증하기는 힘들 것이다.
분명히 스미스는 그의 계획을 바꾸려하거나 어떤 일이 발생하여
그의 참석을 방해할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단어는
예감이나 희망이나 고집 센 의견에 지나지 않는 표현으로 사용될 것이다.
룰렛게임의 다음 숫자를 “알고 있다”는 라스베가스의 도박꾼들은
“예감”에 기반을 둔 예측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에 누가 뽑힐지 “알고 있는” 정치가들과
만약 그들이 잘못됐다면,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희망이나 두려움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아칸소 공과대학이
노틀담 대학보다 더 나은 풋볼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남자가
아칸소 공과대학이 모든 게임에서 지고, 노틀담 대학이 모든 게임에서 이겼을 때,
그는 사실과 관계없으며, 초월적이고, 단순한 맹신적인 충성을 표현한 것이다.
DECARTES'S THEORY OF KNOWLEDGE
만약 우리가 플라톤에서부터
훨씬 후인 데카르트의 지식의 이론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봤다면,
우리는 절대적이며 참된 지식의 발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긍정적인 이론을 찾을 수 있다.
지식의 기초와 근원, 본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많은 면에서 플라톤의 것과 공통점이 있다.
확실성을 위한 탐구.
이 논쟁의 시작에서 우리는 지식의 신뢰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시험을 고찰했다.
그리고 보았듯이 충격적인 결론에 도착했다는 것과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정보
-과학적이고 심지어 수학적인 정보를 포함해서-는
이의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재앙이 된 시험을 제안한 데카르트의 요점은
모든 것에 관한 의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고 항상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하는,
회의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의 목적은 장담컨대, 좋은 기초를 얻으려는 것이고,
젖은 모래와 진흙을 거절하고 단단한 반석을 찾으려는 것이다.
”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에 관한 절대적이고 확실한 기초를 찾으려고 하였다.
만약 거짓이거나 의심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어떤 것이든 제거하기 위해
누군가 그의 시험을 처음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그러한 기초는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기술하였다.
마치 분명히 거짓인 것을 알아낸 것 같이,
조금의 정도라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제시된 모든 것을 유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확실하거나 적어도 내가 그 밖의 것을 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을 배울 수 있을 때까지,
확실한 어떤 것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러한 과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존재의 확실성.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는 의심할 나위없고 확실할 수 있는
어떤 정보를 찾아내려는 시험을 수행하였다.
만약 그가 그러한 지식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인간 지식의 전체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 정보와 과학적 정보와 수학에 의심을 던진 후에,
데카르트는 자신이 찾으려는 정확한 확실성의 찾을 때까지
그의 탐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렇지만 세계에는 하늘, 땅, 정신, 물체가 없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않았던가?
이때 나 자신도 없다고 설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내가 만일 나에게 어떤 것을 설득했다면,
확실히 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 있다고 치자.
자 이제, 그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찾아낸 정보의 유일한 부분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참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거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할 때마다
데카르트의 시험에 따르면, 그것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는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려하거나 그 시험을 시행하려고 할 때,
나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기만자”가 하려는 것을 주장하려할지라도,
그가 나를 속이려는 시도가 어렵다할지라도,
만약 내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속일 수 없다.
만약 내가 생각하며, 데카르트가 요구한다면,
내가 존재한다고 절대적으로 명백해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조건을 생각하려 시도하자마자,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완전하게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의심이나 부정을 위한 어떤 시도도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 위해
나는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하는 또 다른 생각이다.
비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증하려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 주장의 진리를 다시 논증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데카르트의 요점을 강조하는 한 방법은 다음의 이야기를 고려해보는 것이다.
유명한 미국의 철학자 Morris Raphael Cohen이 방과 후
한 학생과 함께 토론에 참가한 것이 보고되었다.
Cohen 교수는 그의 반에 데카르트를 가르쳐왔고,
이 토론에서, 일찍이 윤곽을 그려온 의심을 위한 모든 이유를 전개시켜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학생에게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으라고 집에 보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다음날, 매우 초췌한 학생은 면도도 하지 않고, 눈이 충혈 돼서
방과 후, Cohen 교수에게 왔으며, 매우 걱정된다고 얘기했다.
학생은 밤새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해
결정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숙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공부했었다.
“Cohen 교수님”, 그는 매우 걱정되어 얘기했다.
“말해주세요, 제발 말해주세요. 내가 정말 존재하나요?”
Cohen 교수는 그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도, 데카르트는 마침내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였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회의주의에 의해 제시된 거의 모든 터무니없는 주장은
그것을 흔들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다.
” 이 절대적이고 확실한 진리를 시험을 통해서,
다른 진술들의 진리를 판단하기위한 하나의 규칙이나 규범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모른다고, 그는 희망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진리에 확신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지 나는 또한 알지 못하는가?
확실히 이 기초적인 지식 안에서
그것이 진리라고 나를 납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내가 너무도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이
거짓일 수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내가 단언한 것의 명석함과 지각의 판명을 제외하고,
내가 말한 것이 진리라고 나를 납득시키는 것은 실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일반적인 규칙을 세울 수 있다고 보인다.
내가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는 일반적인 규칙.
데카르트의 논쟁은 하나의 진리(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점검함으로써,
모든 진리에 대한 법칙과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어째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이 진리라고 납득시키는,
이 주장의 유일한 특징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명석하고 판명하게 알거나 이해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명석과 판명이 나의 확신을 만드는 유일한 조건이고,
그것들이 모든 진리들이 가져야 하는 일반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이러한 경우에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명석과 판명이 진리의 기준이나 척도가 아니고,
그것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라면,
그 주장은 분명하게 거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논의는 결론 내렸다.
명석과 판명은 진리의 기준(표시, 특징?)이 될 수 있고,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의 구별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규칙은 체계적일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간에 명석하고 명료하게 생각된 것은 진리이다.”
명석과 판명. 그러나 무엇이 명석과 판명의 특성들인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들>의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만큼
명석과 판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하였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분명하고 명료한 지각이란 무엇인가.
전체 삶 속에서 아무것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하면서)이 있다.
명백하고 논쟁할 수 없는 판단으로 구성되어진 지식은
명석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명석함을 주의 깊은 마음에 나타나고 보이는 것이라고 부른다.
존재가 지각하는 눈에 보일 때, 그들이 충분한 힘을 그것을 조종할 때,
우리는 분명하게 사물을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판명은
너무도 정확하고 그것자체로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언뜻 보아, 이 설명은 매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조심스런 고찰은 데카르트의 요점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인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강제적인 것이라면,
분명히 경험이나 생각은 명석하다. 명석한 생각에 관해
데카르트가 제공한 그 삽화는 대충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치통과 같은 생생한 감각경험이 하나이고,
수학적 사고나 생각하고, 소망하고, 좋아함과 같은 정신적 활동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이 두 가지 형태에서,
마음은 정신적이거나 감각적이든 간에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곧 이야기하게 될 것과 같이 사고는 판명함 없이도 명석할 수 있다.
그 역은 발생할 수 없다.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사고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너무도 생생하고 강력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확신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데카르트가 채용한 한 예는 치통이다. 그 경험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그 인식을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통증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그 고통이 치통에서 온 것인지 마음에서 온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론에 관한 또 다른 논의를 고찰해보면,
고통은 치아 속에서도,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부족한 것은 경험이 무엇인지와 세계의 그 밖의 어떤 것과 구별하는 능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어떤 것과 도저히 혼동할 수 없는 그 경험을 명백히 한다면,
명석함만큼 판명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어떤 생각이 분명해질 것이라면,
그 밖의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고의 인식을 강렬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확실성의 확장.
명석과 판명한 사고의 개념을 더 추적하게 되면,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진리 외에 그 밖의 진리를 요구한다.
이 연구의 동안에,
그는 완전한 확실성과 함께 알 수 있는 우주에 과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그 이론은 결국에 참된 진리의 기준을 위한 더 나은 정당화를 제공하였다.
그의 지식 이론에 관한 논쟁을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간단하게 그의 성장의 남아있는 주장을 살펴 보아야한다.
본유관념.
명석과 판명한 것을 찾기 위한 나의 생각을 고찰할 때,
데카르트는 주장하였다.
내가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은 거의 모든 것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전부터 갖고 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태양이나 인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고블린과 같은 개념들을 포함한다.
데카르트는 경험에서도 온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창조되거나 구성되어진 것도 아닌 경험에서 나온 것도 아닌
본유과념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형태의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알아보겠지만 이 본유관념들은 정말로 명석하고 판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신(GOD).
데카르트가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종류의 관념은
원과 같은 수학적인 개체에 관한 것이고,
또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주장했던 완전한 존재, 신에 대한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이다.우리 스스로는 충분히 완벽하지 않아서,
데카르트는
특히 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서 나타나는 완전에 대한 것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지 유한한, 현세의 창조물이며,
아직 우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가 묻기를,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발견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 안에 있지도 않은 속성의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러한 이유로부터,
그는 수학적인 관념과 신에 대한 관념이 본유관념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범주라고 결론지었다.
그 본유관념은 우리 자신도 아니고 우리 삶의 어떤 사건에 의해서도 아닌
어떤 작용에 의해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데카르트는 이 관념은 어떤 것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 어떤 것은
적어도 관념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완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관념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독립적이며,
전지전능한 실체이고, 나 자신과 만약 그 밖의 것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다.
나는 고안된 관념 속에서 이용하는 이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나의 경험 속에서 그러한 완전성과 같은 어떤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에 관한 관념은
적어도 관념으로서 완전성과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왔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논증했듯이, 그것은 나를 창조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심어놓은 신이 존재해야 한다.
확실성 그 이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두 가지 진리를 확립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여전히 보다 더 나아가서 확실한 지식들을 찾았다.
“그것은 참된 신(과학과 지혜의 모든 놀라움을 포함하고 있는)을
심사숙고하는 것에서부터 세계의 다른 사물의 지식에까지
우리를 이끌도록 하는 하나의 길을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 이 길을 따르는 첫 번째 단계는 만약 신이 완전한 존재라면
그가 인간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사기와 기만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의 속성이 될 수 없다.
이 발견-신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의 기초-은
완전한 존재는 기만자일 수 없고,
그 신은 그가 이전부터 상상했던 악마일수도 없고,
아니라는 것을 데카르트에게 보장해주었다.
만약 신이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전부터 깊이 의심해왔던 수많은 정보가 진짜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기만자가 아닌,
신이 우리에게 진리를 믿도록 원하고,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해낼 필요가 있다.
신은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준 지식의 완전한 믿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의 능력의 분석으로부터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강요된 유일한 판단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어떤 명석, 판명한 관념이든지 동의하도록,
그리고 명석, 판명한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라는 것을 믿도록 강요받았다.
전능한 신이 이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어떤 것이 진리라고 믿을 때,
우리는 실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의 판단을 억제할 수 있다.
신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야에서 어떠한 결론도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념에 관한 존경과 함께,
우리의 믿음이 참이라는 어떤 보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에 관하여 믿을만한 판단 기능을
신이 우리에게 심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는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을 강요하고,
어떤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관한 문제를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악용했을 때, 실수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의도하고 우리에게 강요한 것과 같이 그것들을 사용할 때,
실수할 수 없다.
여기서 몇 가지 예가 도움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명석하고 판명한 수학적 관념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가 2와 3과 5에 관한 관념을 고찰할 때,
우리는 2+3=5라는 것이 명석하고 판명하다는 것을 안다.
신이 우리에게 그 관념과 판단능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에, “2+3=5”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 같은 칼라패치(?)의 그룹을 볼 때,
이것들이 사람이라는 것이 명석하지 않고, 판명하지 않는다고,
이것은 꿈의 일부분이 아닐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보는 것을 판단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경우에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신성한 보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 . 우리는 잘못과 오류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설명했던 것보다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 이해를 통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되어진 것을 제외한
어떤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나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나의 의지를 억제한 만큼 오랫동안, 나는 결코 속을 수 없다.
모든 명석과 판명한 개념은 분명히 어떤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나올 수 없지만,
반드시 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
내가 말하길, 신은 최고로 완전하고 어떤 오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개념이나 참인 판단을 결론내려야 한다.
객관적인 실재를 위한 논쟁.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한 무엇이든지 간에
참이라는 신의 보증에 대해서, 신의 존재, 우리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에 기반을 두어, 데카르트는
우리는 수학적인 지식의 전체 범위가
진리라는 것에 긍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오직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내가 깨어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간에 이 지식은 진리이다.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명석하고 판명하며,
그리고 신은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학적인 지식은
오직 나의 마음속에 관념에 관련된 진리로 주어졌다.
나의 외부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또한 확신할 수 있다는 것과
확실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고찰하지 않았던 정교한 논쟁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우리의 마음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의 경험이 이 세계로부터 나온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본성적인 믿음의 신뢰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기초적인 논증이 제공한 것은 외부의 세계 안에서의 믿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신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 된다.
신은 기만자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의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세계에 안전하게 귀속시키는 속성은
명석하고 판명한 형태의 관념 안에서 찾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연장을 가지고 있는 형태,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진리들이
그것들에 적용된다.
비록 데카르트는 지식과 믿음에 관한 가장 극단적인 의심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정도에 관한 광범위한 이론과 함께,
우리를 속이지 않는 신에 관해서,
신에 관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실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모든 명석하고 판명한 지식은,
정신적인 것만큼 물질적인 개체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수학적인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의 기초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확실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 경험과 같은 명석하지도 않고 판명하지도 않은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확실성을 결코 완성할 수 없다.
그것들이 수학적인 관계에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물리적인 형태의 법칙을 알 수 있지만,
아마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한 환상이나
꿈들인 세계의 판명하지 않거나 명석하지 않은
어떤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색깔, 소리, 냄새) 본유관념의 세계,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은
신이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것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확실성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확실성이다.
의심의 방법, 그것을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정보에 대한 시험은
무엇이 확실하고 그렇지 않은지 우리로 하여금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데카르트는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많은 양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외부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것들은
자연의 확실한 지식에 관한 기초를 제공해준다.
만약 우리가 명석하지도 않고 판명하지도 않은 관념에 기반을 둔 판단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실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 이론의 합리론자.
지식의 이론은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불렀던 “합리론”과 같은 것이다.
독자적인 이성의 확실한 절차를 채용함으로써 우리는 강력한 감각 안에 지식-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거짓일 수 없는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보통 그러한 합리주의적 이론들은 (여기에 나타난 이론들 모두)
감각 경험 안에서는 어떤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찾을 수 없지만,
오직 마음의 영역 안에서만 구해진다고 말해진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모두 참된 지식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가 얻을 수 없지만
타고난 본유관념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합리론자들은
다양한 합리주의적 절차를 통해 진정한 세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실성으로 알려질 수 없는 세계는
일반적으로 현혹시키거나 가짜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세계로 판단되어진다.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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