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자기를 부인하는 것

비타민님 2019. 6. 29. 19:23

             예수가 날 부르는 소리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ㅡ막 8:34

 

여기서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나의 에고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에고의 사람들이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빈배가 와서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못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그는 그 사람에게 당장 비키라고 소리를 칠 것이다.

머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배안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액 그 배가 비어있다면

그는 소리치지도 화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 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하겠는가? –산복-

 

장자 전편을 통털어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한편이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다.

슈바이쳐 박사는 말한다.

우리는 베에 너무 많은 짐을 실었다.

어떤 짐일까? 에고-Ego-의 짐이다.

인생이란 바다를 항해하면서 풍랑을 만나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세상의 부구영화란 무거운 짐을 바다에 버리기 시작을 하는데,

결국 인생의 항구가 보이면

자신의 부서진 배에는 남은 것이란 지친 몸과 욕심과 욕정 밖에 없다고 한다.


에고는 너무 무거워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에고 때문에 수소롭고 고생하며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에고 때문에 날마다 삶에서 다른 배와 부딪친다.

그 배에도 짐을 가득 실은 불쌍한 어떤 사람이 타고 있다.

그들은 각자 삿대질 하며 서로에게 욕을 퍼붓는다.

만일 그 배가 빈배라면 누구에게 욕을 하며 소리를 칠것인가?

그렇다면 에고는 무엇일까?

에고를 내려 놓으라.에고 보다 무거운 짐은 없다.


주 예수님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덛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세상에 지식인들 중에는

자기가 아는 지식이 피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뭐라도 되는 것 처럼 도취되어 살아가는 천박한 사람있다.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사람인데,한때는 지성인으로 불리던 사람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된 나머지

쓰레기 같은 말과 글을 해대는 경우이다.

이런 자들의 창작력이란 지혜의 산물이 아닌 무지의 소산이다.

자신에 대한 무지가 벽 처럼 진실을 가리기 때문에

정신적인 성숙이 정체된 현상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에

동굴에 같힌 자들 중의 하나이다.

"장님이 코끼를 만지며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과 같다.

"난 남들과 달라.

난 남들보다 뛰어나.

난 남들과 같지않아.

넌 틀리지만 난 옳아."

물건이든 지식이든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치렁치렁 매달고 자랑하거나

더 뛰어나게 돋보이려고 한다

항상 주변의 인정받음과 칭찬에 목마르고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이 에고다.

 

어떻게 날 이렇게 대우할 수 있지?

그 사람은 왜 그 모양이지?

저 주장은 이렇고 저래서 잘못된거야.

식으로 불만에 가득 차서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마음이 에고다.

이렇게 해야만 에고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며 만족하는 것이다.

에고는 늘, 언제나 건수만 생기면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크게 한다.

에고는 이렇듯 부정적 에너지를 먹고산다.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없을 때,

에고는 흥미를 잃는다.

잘난척 할 일이 없을 때,

에고는 풀이 죽는다.

에고는 당신과 나

모든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내 안에 있는

교만둥이, 응석받이 에고를 인정하라.

에고를 소멸시키겠다는

강한 부정은 도리어 강한 긍정을 부른다.

다만 이것이 언제 일어나서

나를 곤고하게 만드는지?

주변사람을 힘들게 만드는지

주시해보라. 느껴보라.

에고가 먹잇감을 달라고 나를 충동질할 때

거기에 휘둘리지 말라.

단지 에고가 또 한바탕 난리법썩을

피우겠구나." 자각할 수 있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하니까.

 

최고 좋은 자리만 원하는 응석받이,

나만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는

떼쟁이라는 사실을,

또 다른 내가 자각할 수 있어도

당신은 영적으로

더 깊은 곳으로 진보할 것이다.

 

에고는 진정한 나의 실제가 아니다.

에고를 소멸하는 것이

마음의 정화작업이며

회개이며 용서하는 것이다.

자아를 파쇄하는 것이며, 내 영혼이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 속의 에고가 주기적으로

폭군같은 내 주인이 되어

나를 밀어붙이거나 잡아 흔들고 있는지를

매순간 의식적으로 분별한다는 것이다.

 

매일 묵상하고

내면으로 깊이 침잠한다는 것은

내가 내 생각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주시한다는 것이다.

내 에고를 객관적으로 주시할 때마다

에고는 쪼그라들고

에고의 작용을 눈치챌 때마다

나의 영의식은 확장되거나 열린다.

내 안의 에고가 약해지고 적어질 때

나의 진정한 실체인 신적 자아가 드러난다.

신적 자아는 통찰력과 직관력이 신적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사건과 사람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성령 하나님과 하나된 신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목사라도

에고로만 사는 자들이 너무나 많고

이름없는 평범한 생활인이라고 해도 우주를 관통하는

깊은 영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러기에

작은 자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는 것이다.-모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