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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1편은 복 있는 자와 악인의 앞날을 단호하게 나눈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이나 오만한 자와 동석/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읊조린다. 그는 형통할 것이다.
반면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 결국 망한다.
비단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도 이런 가르침은
어린 시절부터 늘 들어 온 바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의 스승이신 발따사르 그라시안!
그 분은 그의 저서 “인생 편람” 300의 첫항에서 말씀하신다.
“1항Todo está ya en su punto, y el ser persona en el mayor.
Más se requiere hoi para un sabio que antiguamente para siete;
y más es menester para tratar con un solo hombre en estos tiempos
que con todo un pueblo en los passados.”…우리 말로 옮기면..
“오늘날은 모든 것이 그 정점에 도달했다.
그 중에서도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기술은 최고에 달해 있다.
오늘날에는 한 사람의 현인이
옛날 일곱 사람의 현인이 지녔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옛날 한 민족 전체를 다스릴 때보다
오늘날 한 사람을 다루는 데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현지 아르헨티나에 사는 본인도
최근에 같은 동포에게 당하는 일인데,
바람에 날려야 할 악인이 흥함을 본다.
아런 자들은 이악스러워서 교회 안에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리 한인의 위상을 더럽히고 있는 걸 본다.
*참고* http://www.iacea.com.ar/bbs/zboard.php?id=freeboard방문을 하시면 추한 한인의 모습들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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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경제 속에 살면서 선악을 구분하기 어렵게 된
오늘 선인은 누구며 악인은 누군가?
육체노동을 바탕삼은 농경사회에서 게으름은 <악>이었다.
늘 빈둥대다가도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세인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오늘과 달리 게으름은 삶을 헛되게 만든다.
농경사회에선 땅의 소출이 그의 노력을 재는 척도가 되기에
천재지변과 같은 악재를 제외하면
자연이 그의 소행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부지런히 일하면 땅은 일꾼에게 보답한다.
땅에 충실한 자는
자체로 <의인>이라 불러도 큰 무리 없을 것이다.
의인은 그저 <바른 자>를 뜻한다.
정치∙경제적으로 변수가 워낙 많은 오늘,
우리 주위엔 열심히 노력해도
그에 합당한 성과가 없다고 투정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불운을 탓하는 그가 과연 무슨 맘을 먹고
일을 꾸몄는지 묻는다면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불의한 일을 꾸미면서,
일확천금을 기대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가?
본 시편에서
의인과 맞서는 악인은 단지 <밖>에 있는 자를 뜻하진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서 <굽은 것>으로 <바른 열매>를 얻으려는
헛된 심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요즘 주위에 경제행위라는 미명하에 벌리는 일이
거의 <도박>이나 <노름>수준이라 <사업에 성공한 자>를
과연 <의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사업에 실패한 자>는 노력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으려다
실패한 <악인>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젠 판단의 척도마저 잃어버린 세상 아닌가?
안으론 넘실거리는 탐욕을 다스리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할 뿐 아니라
밖으론 타인의 탐욕에 희생되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할 우리 현대인은
어느 때보다 바로 살기 어렵게 되었다.
<의인>이 날로 줄어드는 이유는
날로 팍팍해지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온통 <죄인> 뿐이다.
우리 처지를 보라.
문자 그대로 사회에 살면서 악인과 <동석>하거나
<동행>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는가?
<율법서>도 금한 바, 개 같은 자가 번 돈은
하나님 전에 들이지 말라 했지만
그것을 분별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저 받아 먹을 뿐이다.
어차피 <죄인>이 되어 이들과 함께 구르다가 떠날 세상이라...
그래도 우리는 그나마 정결을 위해 하루하루 애쓰며 산다.
<의인>은 절대적 기준에 합한 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는 더 깨끗해 질 수 없을지 몰라도 <덜> 더러워 질 수는 있다.
때가 덜 탈 수 있는 길을 찾고 걷는 것은
의인이 되겠다는 고상한 목표를 위함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묻지 말자.
불요불급한 논쟁은 결국 묻는 놈이나 답하는 놈을
모두 <악인>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결과 불결이란 잣대로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을 재단한
히브리인들은 결국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명제
곧 자기부정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논리로도 이 파멸의 늪에서 빠져 나올 길은 없다.
본디 그들의 전제나 시발점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품에서 태어난 우리는 본디 <죄>와 무관하다.
<죄>는 <죄>를 <죄>로 규정한다.
한번 <죄>를 끌어 들이면
그것은 <실체>가 되어 <사람>을 지배한다.
<사람>이 <죄>란 관념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을 부린다.
문자 그대로 개가 꼬리치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친다(wag the dog).
이렇게 죄를 <보편화>할 때 제일 신난 놈은 바로<악인>이다.
오십 보, 백 보 논리로 악을 <상대화>한다.
어차피 너나 나 모두 악인 아닌가...정도의 차가 있을 뿐...
그것도 얼마나 된다고...
본 시편의 저자는 이런 파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소박하게 <의인>과 <악인>이 있고
그 앞날은 분명 다르다고 확신한다.
인간의 <원죄>나 <전적 타락>을 외치는 자에게 그는 말한다;
“난 그런 것 모른다. 분명 내 앞엔 선과 악이 있고
그것을 따르는 무리도 있다. 그 중 나는 의인의 길을 택하겠다.
그 마지막이 어떠한지 장담할 수 없다.
적어도 내 경험으론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하더라.”
세상을 단순하게 봐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겠지만...
진정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나 길을 공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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