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회고

비타민님 2013. 3. 28. 20: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망의 속박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속죄의 제사가 드려진 목요일을 맞았다.

현지에서는 Juueves Santo,Viernes Santo라고 한다.

이번 금요일(Viernes Santo)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이 절정에 이루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처참한 수난이 가차 없이 엄습했던 마지막 하루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다시 생생히 느끼면서

십자가를 간절하게 붙들고 남은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받으심(목요일 6-9)

 

 

예수님은 찾아오는 고난을 예상하기면서

십자가를 지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성경은 목요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받으신 때부터

마지막 하루, 정확히 말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21시간의 고통의 일정을 기록하였다

BC 1,447 출애굽 당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마지막 재양이 일어나던 밤에

양의 피를 대문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에는 임하지 않고

비켜 지나가도록 하셨다.

날이 유월절(passover) 기원이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하루 전날 ,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받으신 날이

바로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날 모두 모여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일주일간의 유월절 절기를 지켰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사람으로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다.

 

그런데 만찬이 준비된 과정이 매우 신비하다.

이날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은 이미 만찬이 준비되었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정으로 인도하셨다.

“성내로 들어가면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게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22:10-12).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과 인류의 영원한 속죄와 해방을 위해

하나님의 속죄의 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자신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것이다.

유월절 만찬장에서 중요한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배반하고 있는 제자 유다에게 돌이킬 있는

마지막 경고를 주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14: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13:26)

 

유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배반해야

어쩔 없는 운명을 하나님으로부터 타고 났다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짓이며 모순이다.

유다 자신이 얼마든지 일을 하지 않을 있었다.

그는 평소에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자주 은밀하게 공금을 훔치는 자였다.

유다는 평소에 불의한 일을 행하면서 이미 마귀에게 포로되어 있었다.

“저는 도적이라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6).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13:2).

 

유다는 스스로의 의지에 근거하여 마귀에게 지배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소용된 불행한 인물이다.

그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께서 수차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가 악한 길에서 돌이킬 의사가 없었다.

예수님은 결국 유다를 버리셨다.

 “조각을 받은 사단이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13:27),

 

둘째,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잔은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바로 다음 날에 십자가에서 찢어질

자신의 육신과 흘릴 피를 떡과 포도주로 상징하여 기념하게 하셨다.

그것을 예수님의 피로 가정하여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와 당시의 제자들과 이후 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관계가

오직 십자가에 근거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새롭게 갱신하게 하셨다.

이후 성찬식은 교회가 영원히 실천해야 사명이면서

동시에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다.

 

셋째,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 타인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심적인 특징이며 identity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만찬을 마칠 무렵에 전혀 예기치 않게 제자들 사이에

장차 누가 높은 사람이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자 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오해하고서 그릇된 착각에 빠져 들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

이는 샌달을 신고 사는

유대인들의 일상과 문화 속에서 흔히 보여지는 관례였다.

그러나 남의 발을 닦는 일은 언제나 집의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높은 선생님이었으나

친히 허리를 굽혀 낮은 제자들의 발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예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속된 가치와 오만한 문화에 세뇌되어 군림하고 대접을 받는 것을

성공의 증거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적인 권위나 군림의 질서가 아닌

겸손과 사랑과 섬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마지막 밤에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래서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자기보다 못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본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22:25,26).

우리는 타인의 섬김을 받는 것이 성공의 증거가 아니라

진정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는 섬김을 베푸는 것이

성공을 증거라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넷째, 잠시 후에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모두 도망 것과

특히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기까지

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22:34).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심(목요일 10 ~ 12)

 

사람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살고자 하시는 육신의 욕망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만백성을 구원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신적인 의지가 마지막 각축을 벌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자신을 내려놓기로 작정하셨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

 

예수님의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은

인간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실 있는 힘을 더하셨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도우셨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22:4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방울 같이 되더라”(22:44).

 

그러나 시간에 안타깝게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시간에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기도하지 않았던 그들에게는

다가올 엄청난 고난과 환난을 이길 특별한 능력과 힘이 임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후에 제자들은 철저하게 패배하며 침몰했다.

자기의 목숨을 챙기기 위해 체면도, 의리도, 믿음도 버리고 도망하여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기에 바빴다.

누가 이들이 훗날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홋날 이들은 세상을 요동하게 하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아무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능력있게 증거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군사들로 변했다.

예수를 죽인 바로 관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하는 자들이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없다하니”( 4:19.20)

 

비밀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을 얻기 이전의 사람과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일지라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믿음의 승리는 충분한 기도와 기도를 통하여 얻는 성령충만에 달렸다.

기도하였던 예수님은 무서운 밤에도 완전하게 승리하셨고,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완전하게 패배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완전한 승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쉽게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쉬지 않았던 예수님의 기도에서 기인한 승리였다.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려면 누구나 기도해야 한다.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임한 능력을 받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려면 누구나 기도해야만 한다

 

NO HAY MAYOR AMOR

 

 

No hay mayor amor que dar la vida.

No hay mayor amor. (bis)

Este es mi cuerpo y mi sangre todo esto es lo que soy;

quedo por siempre entre ustedes aunque parta no me voy.

 

No temáis, amigos míos si algún tiempo no me ven,

si entre ustedes se quieren me verán a mí también.

 

El miedo no es sentimiento que abriga el que cree en mí,

recuerden estas palabras: "al mundo yo lo vencí".

 

Les enviaré mi Espíritu que consuela en el dolor;

alentará la esperanza, traerá fuego al corazón.

 

 

 

 

 

NO HAY MAYOR AMOR.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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