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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재고(산상 수훈을 보며)

비타민님 2013. 4. 8. 21:42
     

아래 교회 이미지 아무데나 클릭하면 쓰레기 상조회 관련 기사로 들어 갑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인생들이 모인 상조 넷의 쓰레기 댓글들...감상!

       

현지 현지의 조그마한 촌락에 5~60가구의 한인이 모여 사는

헤네랄 라바졔란 해변에 위치한 개신교가 있다.

10여년 전엔 한인이 낚시를 자주 가는 곳인데..

이 곳엔 물고기 낚시도 하고 현지산 밤여우 낚시도 해서

아주 인기가 있던 곳이라는 소문도 있던 곳이다.

언제나 부정적인 소식과 불법을 권장하는 상조 넷에

http://www.iacea.com.ar/bbs/zboard.php?id=freeboard

이 지방 교회 목회자와 신도님들이 링에서 한판 승부를 해서

신도님들이 목회자에게 TKO당해 거의 다 쫗겨 나고

이 목회자의 후원자는 현지 수도권에 위치한 독재 권위자인

모 목사라고 한다.

본인도 현지 수도권 모 목사의 교회 웹을 보니

주님 나라 전하는 것이 아닌 목사 천당의 독재를 본다

이런 자에게 아부하는 신도들의 신앙관을 ¿…?.....

목사나 신도들이나 분쟁에 휘말림은 큰 시험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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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일학교 어린이가 엄마께

 

"엄마, 거짓말하는게 나쁜가요 도둑질하는게 나쁜가요?"

라고 질문 하였더니...

그엄마는"둘 다 나쁘지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린이가"아니, 엄마 둘 중에 어느것이 제일 나빠요?"

"도둑질 하는 것이 나쁘겠지요?"

"아녜요! 거짓말 하는 것이 더 나쁘죠"

 

"왜요?"

 

"도둑질은 훔쳐간 물건은 되찾을수 있지만

거짓말은 다시 그말을 되돌려줄 수 없어요."

라고 어린아이가 대답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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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세운 이념을 추종하는 자의 삶은 늘 이렇다.

자고로 <>은 외부에서 침입한 다른 주인을 거부한다.

몸은 <정숙한 아내>와 같다.

<외간 남자>가 침입해 안방을 차지하려 들면

입에 <은장도>를 물고 죽을 때까지 저항할 것이다.

외부인의 침입을 방조하는 자는 주인이나 <남편>이 될 수 없듯이

<>을 남이 부리도록 넘겨주는 <>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무릇 종교인이 <정신분열증상>을 보이는 것은 다 이런 이유다.

<제 몸> <남의 맘>으로 제어하려하니 당연한 업보 아닌가?

 

본디 몸과 맘은 말과 생각과 같은 관계다.

아무리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오른다 해도

그에 합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면 생각 자체가 막히듯

내 맘이 내 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몸은 <철없는> 맘의 버릇을 고쳐 줄 날을 찾는다.

따라서 몸은 맘을 바로 쓰도록 돕는 어머니와 같다.

어떤 생각이나 맘이 가능한지 여부與否는

바로 몸이 판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철없는 맘은 끈이 끊어진 연과 같다

잠깐 자유로운 것 같으나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 쳐

다시는 창공을 날지 못하는 것처럼.

맘이 자유를 얻으려면 바른 몸을 바탕 삼아야 한다.

바른 맘은 바른 몸에 성립한다.

몸을 존중하지 않는 맘은

결국 <사물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몸의 원리에 따라 <보복>

곧 고통과 번민을 초래한다.

그 가장 큰 예가 바로 <금욕주의> <쾌락주의>.

제 몸엔 제 나름의 결이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남이 구축한 주의主義, 주장主張을

제 맘과 몸을 제어하는 교조로 삼는 자는 필히 실패한다.

 

무리는 왜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던가?

<남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분도 전통에서 차용한 것을 전할 수 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전도서의 명제를 들 것도 없이

우리가 하는 말은 대부분 어떤 형식으로든

한번은 해 아래 나타난 적 있던 것이다.

 

신조어新造語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같은 말을 <누가> <어떻게> 하는가에 있다.

 

무리는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힘과

자유로 빛나는 예수의 <내면의 언어>를 처음 접했다.

그것은 정결한 심성을 지닌 자 뿐 아니라

종교적 교훈이나 명제로 닳고 닳은 자도 못 볼 수 없는

즉각적 가르침이 산상 수훈이었다.

산위에 올라 깊은 심혼에서 길어 낸 저 <밝은 말>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먹물로 가린 현학자의 기만 같은 것을 보지 못한다.

보이는 대로 본 것과 들리는 대로 들은 것을 전한 예수의 말씀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자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신물神物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종교지도자에게 하신

보긴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긴 들어도 듣지 못하리라” 는

말씀[“마태복음”13 14. 의역]은 결코 수수께끼가 아니다.

그것은 <남의 말> <제 말>을 대신하는 자나

<남의 맘>으로 <제 몸>을 다스리는 자의

눈과 귀에 닥치는 불가피한 재앙이다.

보라. 이런 재앙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젠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그 분과 은밀한 만남>후 홀로 누리게 될

고유한 말과 눈길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슬픈 일이다.

 

오늘 날 <말씀>을 전하려는 자라면

예외 없이 갖추어야 마땅한 덕목 중 덕목이 산상 수훈이다.

평신도나 사제 간 구별이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