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르신들이
감정을
주체 치
못할
때
화냥년이라는
욕을
쓰는
걸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절개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즉,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선시대
환향녀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이혼
청구를
받은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이혼을
청구할
경우에는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선조
때
절개를
잃은
여자의
남편들이
집단으로
왕에게
이혼을
청구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절개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이혼청구를
거절했다.
선조의
이같은
방침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모두
첩을
얻어
부인을
멀리했다.
환향녀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도
많이
발생했다.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으나,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도
“환향녀”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병자호란
후
돌아온
여자들도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아야만
했다.
인조도
선조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인조가
제시한
첩
허용을
받아들였으나,
강화도에서
청군에
붙잡혀
끌려간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는
실절했다는
이유로
시부모로부터
이혼청구를
당했다.
물론
처음엔
인조의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장유가
죽은
후
그의
아내
김씨는
환향녀라는
이유로
며느리를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부모에게
불손하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아
이혼시켰다.
이처럼
암울한
역사의
산물인
환향녀는
신분사회에서
더
이상
설자리가
없었다.
엽기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그
시절
이런
환향녀를
위한
정부대책은
어땠을까?
분명
나라를
다스리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사태파악을
못하거나,
전쟁준비를
다
하지
못해서…
한마디로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이런
불행을
불어들인
위정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지금부터
이
화냥년의
어원과
이율배반적인
조선정부,
아니
조선의
임금들을
따라가
보자.
“여기노
뭐하는
곳이므니까?”
“여기노
도깨비
시장으로
유명한
황학동이므니다.”
“도깨비
시장이노?
네놈이
아예
개념을
물
말았으므니다!
도깨비
시장은
한참이노
뒤에
나오므니다!”
“하…하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서
숙박할
만한
곳을
찾으므니다!”
“하이!”
서울을
점령한
가등청정(加藤淸正
: 가토
기요마사)은
황학동
도깨비
시장을
보러
왔다가,
그
근처에서
하룻밤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등청정이
묵었던
곳이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이었다.
뭐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때부터였는데,
“어이
부관이노!
나보고
진짜
잠만
자라는
것이므니까?”
“예?
수…숙박만
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으므니까?”
“네가
그러니까
평생
부관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므니다!
가토
이꼬르
영웅,
영웅
이꼬르
호색(好色)!
호색
이꼬르…
내가
꼭
추하게
그
다음
말도
말해야
하므니까?”
“아니
뭐,
이왕
추해지신거
확실히
추해지시는
것….”
“칙쑈!
당장
이노무
모가지를!”
“다…당장
구해보겠스므니다!”
가토
기요마사에게
엄청나게
쿠사리를
먹은
부관.
헐레벌떡
여자를
찾았지만,
한밤중에
여자를
구한다는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보도방이라도
불러야
하는데,
어디서
불러야
하므니까?
전쟁
통에
기생들도
다
토낀
상황이므니다.
이거
참
난감하므니다.
애들
시켜서
민가로
여자
잡으러
보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스므니다.
이러다
우리
대장
피가
몰려서
죽는수가
있는데,
하,
이거
참
큰일이므니다.”
이때
이
부관의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운종사(雲鐘寺)의
여승(女僧)들이었다.
“어이!
마사유끼!
저애들은
누구므니까?”
“운종사(雲鐘寺)의
여승(女僧)들이므니다.”
“여자가
있었지
않은가!”
“아니,
중이지
않스므니까….”
“중은
여자가
아니란
말이므니까?
당장
끌고오므니다!”
이리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부관은
운종사의
여승들을
잡아다가
가토와
그의
장수들에게
끌고
가는데,
이렇게
대사(大事)를
치룬
가토
기요마사
일행들은
얼마
뒤
운종사를
떠나게
된다.
문제는
갈
때
곱게
떠날
왜놈들이
아니란
것이다.
“마지막이노
불꽃놀이
한번
하고
가므니다!”
가토,
운종사를
불태워
버린
것이었다.
결국
겁탈당한
여승들은
하는
수
없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府君堂)밑에
토막(土幕)을
짓고
살았는데…
덜컥
임신을
한
여승들이
하나
둘
생겼던
것이다.
이를
어찌할꼬…결국
이
여승들은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다.
이때부터
이
융경산
부군당
밑
토막집을
이태원(異胎院
: 다른
이,
즉
왜인의
아이를
벤
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이태원에
어떤
이가
배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배나무가
너무
잘
자라
이태원(異胎院)일대를
이태원(梨泰院
: 배나무가
크게
자라는
집)이라고
불렀다.
뭐
여기까지는
운종사
여승들의
불행
정도로
끝이
나는
이야기
이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명나라의
원군과
남도에서
일본
해군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전공에
밀려
왜군들이
서울을
포기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주로
몽진(蒙塵)길에
오른
선조도
환도(還都)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슬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전하,
상황이
좀
묘하게
꼬이기
시작하는뎁쑈?”
“또
뭐?
닝기리…폼
나는
건
광해가
다
하고,
난
맨날
골치
아픈
것만
떠
맡냐?
이번엔
또
뭔데?”
“전쟁통에
말입니다.
왜놈들한테
겁탈당한
여자
애들
말입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
왜놈들
한테
따져야지!”
“아니
거시기...
지금
상황에서
왜놈들한테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니까!
개인의
불행을
전부다
나라
잘못으로
떠맡기는…
이런
못된
국민성
때문에
나라가
발전을
못해요
발전을!
그
딴
건
지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해!
아닌
말로
지들이
발이
느려서
피난
못가
당한건데,
그걸
왜
국가한테
따지나?”
“저기
전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이거
잘못
다뤘다간
정권의
안보가…
아니
왕조
자체가
뒤바뀔수도
있는
문제라서….”
“뭐?
이건
또
뭐하자는
시츄에이션이야?
어이
영의정
제대로
한번
설명해봐!
뜬구름
잡듯이
말하지
말고!”
“전하,
그것이…지면관계상
다음회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면관계상
다음회로
미루어진
정권의
안보가
달린
문제…
과연
그
문제는
무엇일까?
초특급
울트라
역사
사극
‘화냥년이
무엇이더냐?’는
첨지가
눈치껃
미뤄
다음회로
이어지는데…
암튼...커밍
쑨!
지면관계상
뒤로
미루어
졌던
영의정의
‘정권
안보와
겁탈에
관한
후속조치’에
관한
이야기가
대전(大殿)안에
고고히
흘러
퍼지는데,
“그러니까
전하,
조선의
기본
컨셉이
무엇입니까?”
“그거야
유교아냐?
이
자식
지금
누굴 1, 3, 5, 7, 9로
보나….”
“전하,
그것이
말입니다.
전쟁
통에
정조를
지킨
꽤
괜찮은
여자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
저번에
올라온
장계
보니까
경상도
어딘가에서는
왜군놈들이
젖가슴
만졌다고,
자기
가슴
두
개를
다
자른
다음에
자결한
아주
훌륭한
처자도
있더만.
그런
애들한테
열녀문
같은
거
지어
져야
한다니까.”
“그렇죠.
당연히
지어져야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정조를
지킨
여자들
보다
그렇지
않은
애들이
훨씬
많다는
거죠.”
“그건
걔네들
잘못
아냐?
지들도
당했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번
해야
할
거
아냐?”
“전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기본
미니멈
수천명…
맥시넘
수만명의
여자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많냐?”
“쳐들어온
왜군만 15만입니다.
전하
머리가
있으면
계산을
좀
해보십쑈.
그
머리
그거
악세사리로
달고
다니시는
겁니까?”
“…영의정,
그런데
말하는
게
너
참
거시기
하다?”
“전하가
거시기
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지금
나라가
완전
개판 1분전인
상황인데!”
“아니
뭐…여하튼
그래서,
어쩌자고?”
이게
또
우리나라
남자들이
그노무
처녀막에
얼마나
집착합니까?”
“그렇지!
우리나라가
또
처녀막
재생수술에
있어서는
세계
제1의
선진국이잖아?
이
참에
나라에서
국고보조금을
주고,
대규모로
처녀막
재생수술을….”
“애
벤
애들은
어쩝니까?
애
낳은
애들은?
그리고
유부녀들은
어쩝니까?”
“…….”
그랬다.
이
당시
전란이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양반가문을
중심으로
‘왜놈들의
겁탈에
의한
이혼
청구소송’이
줄을
이었다.
너도나도
주장하는
단
한
가지!
“어떻게
딴
놈이랑
살을
섞은
여편네랑
같이
살
수
있습니까?”
“아무리
전시상황이라지만,
이런
강상의
윤리를
어지럽힌
마누라랑은
같이
살
수
없습니다!”
남자들이
못나서
일어난
전쟁,
그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은
그렇게
다시
한번
남자들에
의해
짓밟히게
되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터지면
가장
큰
피해자는
젊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라더니….
“전하,
만약에
이
이혼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나라가
절딴
납니다.
이혼을
하겠다는
애들이
한
두
명이겠습니까?
만약에
이혼당한
처자가
있는
집안에서
불만을
쏟아내게
되면,
그게
곧바로
정권에
대한
분노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런
된장!
그럼
어떻게
하지?
무조건
이혼금지령을
내릴까?”
“무조건
내려야죠!
이혼
절대불가를
선언해야
합니다!”
“오케이
거기까지!
접수했어!”
이리하여
선조는
‘왜놈들의
겁탈에
의한
이혼
청구’에
대해
불가
입장을
천명하게
되는데,
그런다고
이혼을
안
할
남자들이
아니었으니,
억지로
데리고
살긴
하지만
저마다
첩을
다
두었고,
갖은
핑계…
그러니까
시부모
말을
안
듣는다거나,
품행이
어지럽다는
이유
등등.
다른
이유로
이혼을
청구하게
된다.
자,
문제는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면서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
졌는데,
왜놈의
아이를
잉태한
환향녀(還鄕女)와
이미
아이를
낳은
여자들의
처리를
어찌할
것이냐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야…얘들
어떻게
하냐?”
“…….”
“입이
있으면
좀
말들
좀
해봐!
세비
올리자고
할때는
입에
거품물고
지랄하던
놈들이
왜
이런
문제에는
입도
뻥긋
안하는데?
입에
공업용
미싱으로
오바로크를
쳤냐?”
“저기
전하,
방법이
하나
있긴
있사온데….”
“그래?
얼른
풀어
봐봐.
뭔
방법인데?”
“어차피
걔네들,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수도
없는거고…
이렇게
된
거
걔네들을
집단으로
모아놓고,
걔네들끼리
살라고
하는
게
제일
낫을
거
같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운종사(雲鐘寺)
여승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던데…
사람들이
그
집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부르면서
군락지를
형성했습니다.”
“음….”
“뭐
어차피
쫑친
인생이지만,
그래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습니까?”
이리하여
이태원(異胎院)은
왜놈들에게
겁탈당해
임신한
여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으니,
바로
환향녀(還鄕女)의
쉼터라
불리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태원을
가보면
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이런
연유가
깃들여서인지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환향녀(還鄕女)에
대한
이야기를
접을
수
있으면
아주
좋겠지만,
역사란
언제나
반복되는
것…
임진왜란으로도
정신
못
차린
조선의
위정자들
때문에
제2의
환향녀(還鄕女)
사태가
벌어지니…
그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이
병자호란에
관한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다음회로
미루겠다.
그럼
다음회에
뵙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