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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단체는 왜 이런 모습인가?

비타민님 2013. 6. 27. 20:44

유럽리포트 : 2013-04-26 () 참조하여 비타민은 논술함

 

현지 교포들이 단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단체 운영은 곧 권력행사나 감투 쓰기와 동일시되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권력시향성(權力視向性)은 해외교포뿐 아니라

본국의 정치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특성이다.

이 뿌리는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는

유교적인 전통과 사대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문화”의 뿌리는 단숨에 극복, 제거될 수 없기에

우리는 앞으로 2세들이 이러한 우리문화를 과연 어떻게 극복,

우리의 전통 문화를 계승할 것인가 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 한인 교포사회에는 많은 모임이 잇다.

모임의 목적이 뚜렷한 스포츠나 혹은 취미생활을 위한

동호인그룹이 대부분이지만 

성격이 애매하여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모임도 적지 않다.

정치색채를 띤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국에서 있을법한

교민간의 친목활동이 중점을 이루는 모임도 아니다.

또 이런 단체 중에는 매우 수명이 짧은 단체도 있어

설립모임은 큰 재정부담을 지면서 거창하게 치루고

그 후에는 전혀 활동이 없는 수수께끼 같은 단체도 있다.

 

현지에 한 때 경기가 좋을 때에 있던 단체들인데,

장노 골프 동호회,목회자 테니스회,기독인 골프회..등 등..

 

현지 사회에서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단체는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의 단체나 사회활동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로는 외국생활에의 적응을 도와주며

1.5~2세에 대한 장래의 문제, 우리의 내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작업 등

다양한 구체적인 과제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물론 친목을 위한 자연스런 모임도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현지의 40여년 이민자의 생활을 살펴보며는

우리는 아직도 외국생활의 정착기를 넘어섰다고 볼 수 없는 단계에 있다.

이런 성격을 띤 모임이나 단체의 필요성은 누구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포사회의 연륜이 20, 30년이 되도록

이러한 요구가 뜻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자믄을 해 본다.

 

그것은 우리의 단체운영상의 기술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 보다는 외부에 제시하는 단체설립 원래의 목적과는

다른 면으로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어디서나 대동소이하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우선 어마어마한 정관이 따라야 하고

모든 격식을 다 갖춰 단체장을 선출한다.

수없이 많은 책임부서가 생겨나고

자문위원이라는 명칭의 명예직도 있어야 한다.

직책의 분담이 중요한 요식행위가 된다.

업무내용은 형식에 불과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체적인 업무방향을 설정하기 이전에

단체구성이라는 형식에 짓눌려 버리게 된다.

직책부터 창출하고 배정하는 것이 중대한 업무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단체구성원간에는 횡적으로 동등한 관계라기보다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단체의 틀을 잡은 것으로 인정되며 만족스러워 한다.

이러한 형식은 단체구성의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이는 권력구조의 틀을 이루어 놓는 행위이다.

단체장의 권위를 중심으로 권력의 집결체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을 띤 단체구성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문제는 단체를 둘러싸고

불화의 소지가 다분히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모임구성의 심리적인 동기를

활동내용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보다는

단체를 구성한다는 행위자체에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따라서 권력을 차지하는 단체장자리를 획득하기 위해

집단이기주의, 학연, 지연 등 한국인 특유의 특성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이 단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하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내용은 일단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누가 높고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데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다.

일단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원래의 자기목적이 달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일반적으로 한국 정치단체에서도 흔히 보는 바와 같다.

한국 정계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해외교포들의 모임도 규모나 행동자원이 다를 뿐

그 근본을 캐고 들어가면 이와 대동소이한

전형적인 한국적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이와 같이 권력 지향적이고 권세를 부리기 위한 성격의 단체이므로 회장선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최근 인터넷을통해 본 미국의 한 단체에서

회장선거전후에 벌어진 불화도 이런 양상을 띠고 있다.

선거를 둘러싸고

집단이기주의와 오로지 감투를 둘러싼 불화로 번져갔다.

단체운영을 위한 프로그람이나 인물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화의 강도도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현지의 수많은 단체와 개신 교단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우리 단체들이 이와 같이 지향 점을 설정하지 못하고

권세를 위한 단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일반 교민들은 대부분의 단체에 대해 무관심하며 

냉담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자면 교민회장이나 단체장이 단독 후보로 당선!

또한 현지 모 단체들을 보면 명목 좋은 회비 걷기에 급급하고

담당 경찰서 퍼주기에 아양떨기 짓을 하니 사대주의에 적자들 이다.

 

누가 단체를 조직하든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나의 집단과 어떤 식으로든 연계가 맺어지는 경우이다.

이 때는 갑자기 폭발적인 관심이 발동된다.

모든 선거에서 벌어진 공통적인 양태였다.

 

이와 같은 현지 한인사회의 단체구성과 운영을 둘러싼 관행이

비단 아르헨티나 교민에만 국한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양상은 세계 도처에 나가있는

해외교포들이 모인 곳이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해방 전 재미 독립 운동가들이

샌프란시스코 대로상에서 상투를 자르고 싸움을 벌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90년대에 들어 와서도 LA 한인회의 법정 시비,

시카고 한인들의 추한 모습 등 우리 교포들이 많이 모인 곳일수록

더욱 규모가 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뉴욕한인사회를 보자.

163만 미국교포가 두 번째로 많이 모여 사는 도시다.

여기엔 한인회 외에도 많은 단체가 있는데

교민사회의 고령화를 반영하듯 “노인회”가 구성되어 있다.

그 수는 뉴욕 시내에만 무려 16(!)나 된다.

왜 이렇게 많은 단체와

이에 따르는 단체장 이하 각종 감투가 생겨나야 하는지

근원을 캐보지 않고 무심히 넘길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비 온뒤에 솟아나는 버섯같이

수많은 교회가 생기는 현상과 그 뿌리가 다를 바 없다.

뉴욕에 있는 이 많은 노인단체중 가장 전통 있고 규모 있는 단체라는

‘상록회’는 지난1월 회장선거를 가졌다. 이 선거가 끝나자

부회장 위시로 약 반수의 임원이 회장단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선거의 적법성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두 파는 서로 30분 간격을 두고 각기 시내 다른 지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진지하게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권력을 행세하고 감투를 향유하는 순간인 듯 하다.

이 단체는 지금까지 연속 이런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교민들은 상을 찌푸리고

언론도 매년 되풀이되는 상투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의 기본적인 이해관계가 마찰을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타협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선거를 마친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도 불화가 생기고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불화의 모습은 세계 한인이 있는 곳이면

꼭 일어나고 있는 단체가 안고 있는 불화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

 

아르헨티나에도 수없이 많은 외국인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추행은

다른 어느 나라 민족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치적인 견해차이로 단체가 분리되는 경우는 있어도

우리처럼 단순히 권력과 감투를 장악하기 위해

무의미한 분쟁을 일삼는 민족은 없다.

같은 아시아계통민족을 보아도,

민주의적이면서도 할 일을 깨끗이 처리해나가는 일본인을 볼 수 있고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없을 정도의 상호협조정신을 보이는

중국인들은 우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모한 비교겠지만

유대인들은 둘이 모이면 세 가지 다른 의견이 나온다고 한다.

그 정도로 다양한 의견의 종합을 위한

토론의 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행동양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 한국인 특유의 뿌리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해답은 우리 생활의식이 뿌리박고 있는

유교문화의 영향을 꼽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권위적인 사회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는 생각해 보는 판단행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시아에서도 원조인 중국도 그렇지 않는데

한국만이 유독 유교의 영향이 크게 뿌리박고 있는 나라다.

그만큼 한국인의 감투욕은 우리 무의식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

한국 심리학자들의 분석결과다.

유교에서는 벼슬자라를 얻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정치지향적인 이념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선비들이 학문을 하는 목적이나 도덕적인 수양도

세도를 피울 수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한

정치지향, 권력지향적인 의식에 의해 지배되었다.

권세를 부릴 수 있는 힘은 출세와 직결되는 척도로 받아졌다.

즉 궁극적으로는 정치라는 가치체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권력을 잡고 권세를 부린다는 데 일차적인 목표가 주어지고

이 행위는 바로 정치와 동일시되었다.

이런 양태는 물론 외국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정계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사회 어떤 분야를 들여다보나 그 속은 비슷하다는 것이

국내 한국인들의 하나같은 의견이다.

대학에서까지도 감투자리를 놓고 치열한 패거리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모임이나 권위 있는 독재자(?)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 한

이 권위를 탈취하기 위해 벌어지는 행태에 대해서는

“밑에서 기어오른다”는 표현을 쓴다.

과학 분야의 권위자들도 마찬가지다.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후배들에게 접근을 두려워할 정도로 엄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치이념이라고 한다.

학문의 태도가 아니라

권력과 권세를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외국에서 보는 학계 인물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최근 서울대학 사회계열 학생들 간에는

몇 년 전 한 교수님의 하신 말씀이 귀에 생생한 모양이다.

그 말씀인즉

“내가 이 나이에 학생들이나 가르치고 있게 되었느냐”하는

인생 철학관이었다.

그 후 그는 학계를 떠나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상당한 벼슬자리를 맡았다. 누군지는 집작을 하시리라.

몇 년이 지나도록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 말씀이 전해내려 오고 있을 정도로

학생들이 이를 쇽킹하게 받아드렸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징후라 하겠다.

평생을 바쳐온 학문의 길도

종국적으로는 권력과 감투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깨닫게 된

학생들은 이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독일교민사회에서도 유사한 실예를 들 수 있다.

단체장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한 인사는

“내 사업체는 한국인을 상대하지 않는다.

앞으로 교포들과 관계를 끊겠다”고 공언을해

많은 교민들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이 말은 “나는 감투에만 욕심이 있었다.

한인사회문제는 나의 관심 밖이다”라는

마음가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명쾌한 표현에 교민들이 놀란 듯하지만

그 정도와 표현방법이 다를 뿐

많은 단체구성이 이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또 이런 양상은

개개인의 성장과정이나 가정배경, 교육수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한국인 문화의 특성이다.

 

2차대전 후 유럽에서는 미국인에 대해

Ugly American(추한 미국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대명사를 붙였다.

의례와 형식을 중시하는 유렵인 이 느끼는

생활 습관의 차이에 기인한 평가였다.

우리는 이제 역시 문화와 전통의 차이에서 유래된

“추한 한국인”의 모습을 아르헨티나에서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우리 문화의 고유성, 우수성에 대한 교육을

주입식으로 받아 왔다.

이 무거운 짐에 억눌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관망하지 못했다.

볼 수 있는 능력조차 키워주지 못했다.

그러면서 끝없이 우리 것을 좋아하고 찬양하여 왔다.

더욱 위험스러운 것은 마치 학교에서 일등, 이등을 가리듯이

문화의 우열을 가리려는 한국적 근시안적 타성이다.

우리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문화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위험한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 생각지 않았다.

 

문화의 우열의식은 인종의 우열로 이어지고

이 결과는 한국인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사고로

더 심하게는 고립된 인종주의 로 이어지고 있다.

문화는 상위하위를 따지는 비교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단지 우리에게는 우리문화가 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자기비판적인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우리 의식구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유교적 가치가

현사회에 끼치고 있는 폐해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관조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이미 1920년대 소설가 춘원 이 광수 가

조선 사람의 전통관습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썼다가

당시 지식인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우리 관례의 범위를 넘어 문화, 민족성까지 거론했으니

당시의 민족주의적 사고가 팽배했던 상황에서

용납되지 않았음은 이해가 간다.

이제 독립국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우리의 외양에

구시대적인 의식이 허용될 수 없다.

현재 정부나 언론에서도 이런 점을 파악하고

대대적인 의식개혁을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우리 해외교포가 국내의 변혁을 유도할 수 있을 만큼

서구문화에 대한 수용력과 적응력을 발휘했어야만 한다.

이제라도 해외교포는

이와 같이 국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민감해야 하겠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 사회에도 적응할 수 없는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지 한인 사회를 보면 무능력의 시대 감각 결여자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관심사로 염려되는 점은

앞으로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에게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흔히 1세대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런 데 화제가 쏠리고

대부분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 사실로 되어야 한다.

또 이것이 우리의 강렬한 바람인 것도 사실이다.

 

이 결과는 1세대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으며

한인사회에도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현지 한인들의 엄청난 의식의 변화,

문화의 변화를 동반하는 과정으로 동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