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왈..맹자왈...의 공자님 모습입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품었고
설흔에 뜻을 확고하게 세웠고,
나이 마흔에 인생관이 뚜렷해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었고
나이 오십에 천명을 깨달았고
예순에는 어떤 말(좋고 나쁜 말)을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귀에 거슬림 없이 듣다)
일흔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어떤 일을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자는
70이 넘은 아버지와
16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공자가 세 살 무렵에 부가 사망,
어머니 홀로 그를 키웠다.
공자가 살던 춘추천국시대엔
사내 아이들은 대개 너댓살부터 공부를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당근 먹고살만한
가정만 해당된다.
당시의 서적이 모두 죽간에 씌여졌다는 걸 기억한다면,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가정 형편으로 겨우 열다섯에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주 초에 예순이 되는 상연 회원이 신교인이가도 한데
젊은 사람으로 가장하면 필자와 콜롬보씨 험담을 한다.
나이와 성경 말씀은 어디로 처먹은 짓인지?...한다.
문제는 이런 나이값 안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순'과
'종심'이라는
'형식적'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 라는
것이다.
아,
이분들이 나이도 연장자시고,
화장실에 앉아 본 것도 수천번 이상일 것이고,
밥을 드셨어도 수천 그릇을 자셨을텐데,
'어린 놈'으로
가장하면서
그 어찌 필자와 콜롬보
'어른'들을
책잡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파렴치한은
딸자식같은 어린 소녀의 가슴에
'성추행'을
능가하는
헛소리로 못질을 해대는 수준이라면,
이건
'의도적 노망'이고
정말 '살의에
준하는 명예훼손'으로,
다시는 빛을 볼 수 없도록 네티즌들의 이름으로
망신을 주는는 게 어떻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기 눈에 맞는 색으로만
걸러내고,
자기 듣기에 좋은 것으로만 듣고(정말
불쌍한 '이순'이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하는(;종심)
단계라면
'노망'이지
'득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자질스런 자가 나이값을
<못>하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거나 능력이 안되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나이값을
<안>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안하는 것이기에
인생을 심각하게
'왜곡해서'
살아온 것이며,
최후까지도 바뀔 가능성은 커녕
그렇게 할 노력조차도 안하는 것이기에 인생 헛 산 것이다.
이런 자들이 심심하면 들먹이는 것 중의 하나가
관중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후반부 구절은 언급하질 않는다.
자기 욕하는 건 알거든.
<곡식 창고가 가득차고 물자가
풍족해지면
비로소 백성은 예절을 알고,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지면 영욕을
비로소 알게 된다.
위에서 절도를 지키면 육친(부모/형제/처자)이
굳게 화목한다.
이민와서 돈을 벌고 친족과 같은 동내끼리만 잘 먹고
'쎄쎄세'..짝짝궁하고
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다하고 예의염치를 지켜야 아랫사람에게 본이 되고,
현지
2세들도 기쁘게 흉내내고
좇으려고 할 텐데,
아무런 교훈은 커녕,
허구헌날 선한 네티즌들을
위협하고,
길가는 아무에게나 침뱉고 힘자랑하는데,
그렇잖아도 마음의 창고에 먼지 수북하고 분노가 이글거리는
햔지 한인 네티즌 가슴팎에 대못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이 사십이 넘었으면 언제든지 세상을 뜰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고,
나이 육십이 넘었으면 그렇게
살게 해준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며,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는 게 최소한의
'나이가 준 무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불쌍해서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지만,
결론은 그만 나이값 좀 하며 살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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