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을 돌아가면 “다니”라는 아들 또래의 친구가 산다.
내가 사는 동네의 터주대감의 후손이다..
어제 오후에 심심해서 마슬을 “다니”네 집으로 가서
거기 모인 젊은 친구들로 부터 세상사는 이야기도 듣고
또 콜 방장이 넷에 올린 강도 사건도 의논을 해 본다.
이 친구는 “Calle salvaje=미쳐진 길거리”의 박사님이기도 하다.
많은 걸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고 이 친구들이 나에겐 참 잘 한다.
물론 이 나라식으로 터놓고 서로 반말을 한다…
나 먹으라고 “로모”와 엠빠나다 3개,피쟈 한판,사과 8개도 준다.
내가 늙은이임으로 자기들이 보살피니 걱정하지 말란다.
마음으로 고맙기만 하다…그럼 넷에서 본 글을 소개한다..
꼬레아르헨띠노와 카레이스키 이민자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힌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아르헨티나에 무한한 감사를 하고 있다.
옛 소련 독재자 스탈린이 극동 연해주 지방에 살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지 올해로 70년이 된다.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살다가 옛소련의 횡포에 등 떼밀려
삶의 터전을 잃은 채 낯선 땅에 내던져졌던 고려인들은
험난한 세월을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로 헤쳐나왔다.
1990년대 초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룬 뒤 이들 고려인,
이른바 ‘카레이스키’들은 제2의 시련기를 맞았으나
한국의 경제발전과 중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류 붐에
재도약의 희망과 용기를 얻고 있다.
‘죽으라고 보낸 땅’ 논밭 만든 고려인들
“어머니 따라 9월에 기차에 실려서 스무이레동안 왔댔지.
우리도, 우즈베크 사람들도 서로 말 모르지. 말 조금식 배워가고,
첫 시작 모지(무지) 바쁘게 살았댔어. 고려 사람들, 정말 바삐 살았댔어.”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스탈린의 ‘극동 조선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부모 손에 이끌려 머나먼 우즈베키스탄에 내쳐졌던 고려인 소년들은
이제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가 되어
지나온 70년 험난했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다.
지난 8일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교외 치르치크 부근
시온고의 고려인 마을을 찾았다.
여느 한국 시골마을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한적한 농촌 마을 가운데엔
한국-중앙아시아 교류진흥회 박강윤 회장 도움으로 지어진
노인회관과 문화센터 건물이 들어서 있고
제법 너른 길 한켠으로 고려인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고려인 심이반(80)씨는
함경북도 단천 출신의 부모 밑에 태어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열 살 되던 해인 1937년 홀어머니와 함께
기차에 실려 시온고까지 왔다고 했다.
“물 제조, 음식 제조 모두 다르고, 여긴 다 깔밭(뻘밭)이었어.
트랙터로 전부 일궈
1941년 고려인 농업조합을 만들 때까지 밤낮없이 일했지.”
열네살에 기차에 태워져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1년만에 우즈베크스탄으로 옮겨왔다는
한니콜라이(한국명 한세옥·84)씨는
“새벽 3시에 나가 밤 9시까지 일했다”면서
“형제간도 잊고 부모도 잊을만큼
그렇게 일해서 논밭을 일궜다”고 귀띔했다.
말 다르고 물 달라 못 먹던 시절
고생담을 털어놓는 노인들의 눈가는 어느새 축축해졌다.
이곳 노인들 치고, 그런 고생담 하나 없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물기를 찾기 힘든 메마른 땅으로 보이지만
70년 전만 해도 이 곳은 동식물조차 제대로 못사는 뻘밭이었다.
1937년부터 1941년 시온고 조합이 만들어질 때까지
고려인들의 고생을 말해 무엇하랴.
1940년대 초반은 최악의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소련이 1942년
독일과 ‘조국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궁핍은 기근으로 이어졌다.
비타민이 모자라 아이들은 이가 빠졌고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낯선 땅에 이식된 고려인들은
채소와 독초를 구분 못해 아무거나 뽑아먹다 중독돼 죽고,
학질 천연두에 시달렸다.
고난을 이겨낸 이후 1970~80년대는 고려인 조합의 황금기였다.
고려인들은 당시 진흙을 이겨 만든 집을 고치고
손봐가며 아직까지 살고 있다.
“스탈린은 고려인들 죽으라고 깔밭에 보냈는데
악착같은 고려인들은 그것을 일궈 논으로 만들었지.
우린 일밖에 몰랐댔지.
그래 노력영웅(옛 소련에서 노동 공로자에게 주는 칭호)이
시온고에서 21명이 나와 러시아에서도 최고였어.”
뻘밭을 일궈 논을 만든 것은 고려인이 아니면 못할 일이었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시절부터
고려인들은 불모지를 개간한 공로와 기술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강제이주 과정에서
억울한 죄를 쓰고 죽은 이들의 복권도 일부 이뤄졌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교외 시온고의 고려인 마을.
지난 8일 고려인 노인들이 한국 교민의 도움으로 세워진
노인회관 마당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노력영웅 줄줄이 낸 근면성과 교육열
1960년대엔 이 마을에 650호가 살았는데 교육열이 높고 근면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하고 활기찬 마을이었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자랑은 특히 높은 교육열과 배우려는 마음.
어린 자식을 이끌고 온 고려인 1세대들은
배 굶어가며 자식들을 가르쳤다.
한니콜라이씨는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아이들 다 키워 보낸 뒤인 1966년 늦게나마
인근 치르치크 지역의 전기전문학교에 진학해 공부를 했다.
생후 일곱달 만에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왔다는
안 로베르트(한국명 안용선·70)씨는
과거 시온고 조합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아이들 키운 뒤 50살에 공업대학에서 늦깎이 공부를 했다.
이 마을 노인 중에는 ‘엘리트’여서
지금도 상(喪)이 있거나 마을 잔치가 있으면 준비를 맡아한다.
그는 “고려인들은 자식들을 되도록이면 꼭 대학에 보내고
자신들도 늦게라도 반드시 공부를 했다”면서
옛소련 시절 낯선 땅에서도 인정받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
그런 열정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독립 이후 제2의 시련기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 지금의 시온고 마을은 확실히 활기가 없어보였다.
지난 날을 돌아보는 노인들의 눈에는 회한이 넘쳤지만 사실 고려인들은
1992년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뒤 재차 시련기를 맞았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국민 70% 이상을 차지하는
우즈벡인 중심의 정부를 꾸리면서
소련 시절 정부 고용인력의 상당 비중을 차지했던 고려인들을 내보냈다.
러시아어만 알고 우즈벡어를 모르는 고려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생독립국 우즈베키스탄은 실업률이 높았으며,
경제발전도 인접한 카자흐스탄 등보다 뒤쳐졌다.
일할 수 있는 청장년층은 농촌마을을 떠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한국 등지에 일하러 떠났다.
시온고 마을에서도 젊은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인들과 어린아이들만 거주하는 조용한 마을이 돼버린 것이다.
젊은층은 모두 외지로 일하러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활기를 잃은 시온고 마을.
소련 시절 조합 중심의 지역별 생산단위에서 일했던 고려인들은
현재 월 3만~5만 숨(약 2만~4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시온고의 노인들은 텃밭에서 나는 곡식과
외지로 일 나간 자녀들이 보내주는 돈,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국 붐에서 희망찾는 고려인들
독립과 함께 시온고 조합이 해체된 뒤 극도의 침체기를 맞았던
고려인 공동체들은 최근 한국 붐과 한류 덕에 희망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시온고 마을에는 한국 교민의 도움으로 마을회관이 지어지고
노인회 등 새로운 모임들이 조직됐다.
마을회관에서는 젊은이들이 우즈베키스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즈벡어를 가르치며, 한국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영어와 컴퓨터,
한글도 교육시키고 있다.
2005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는 등
한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다.
한국 기업인이나 교민들의 방문이 아니더라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TV만 틀면
한국 경제와 문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의 진출과 한국 상품 유행, 한류 붐에 힘입어
한국 말과 문화에 관심을 갖는 우즈벡인들이 최근 크게 늘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어 습득이 용이한 고려인들도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에겐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가진 든든한 ‘친정’이 생긴 셈이다.
이반 할아버지 댁에서.
심이반씨는 딸 셋 아들 둘 다섯자녀를 두었는데 수도 타슈켄트와
러시아, 한국 반월공단 등에 그중 넷이 나가 일하고 있다.
해질 무렵 심씨의 집을 찾아가자
한국에서 일하는 딸이 가져다준 오징어포와 보드를 내놓았다.
러시아어와 서투른 한국말을 섞어
“잘 사는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고려인 노인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기대감이 역력했다.
■ 러시아 고려인의 역사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현재 남아있는 기록 상으로는 1860년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다.
17세기 제정 러시아는 시베리아 식민을 적극 추진하고 군사거점들을 만들었으나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을 체결, 청나라 영토로 인정하면서
러시아인의 연해주 집단 이주정책을 중단했다.
그러나 1858년 아이훈 조약을 계기로 연해주는 결국 러시아 영토가 됐다.
시베리아가 러시아령이 되면서
한인 거주민들과 러시아 간의 마찰이 시작됐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한반도 정치ㆍ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지고
결국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자 연해주로 향하는 유민 행렬이 이어졌다.
소련 스탈린 정권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한인 규모가 커지는 것에도 위협을 느껴 강제이주를 결정하게 된다.
1937년 스탈린이 서명한 `명령번호 1428-326' 문건은
"일본의 간첩행위가 극동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연해주 극동 국경지역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시키도록 하고 있다.
"지체 없이 추방을 시작하여
1938년 1월1일까지 추방작업을 종결한다"는 이 명령에 따라
6000㎞ 거리에 이르는 한인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총 3만6422가구 17만여명이 이 조치로 이주를 했고,
그 과정에서 `간첩 행위자'로 몰린
한인 지식인 2500여명이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가 본격화된 1937년9월부터 이듬해 상반기까지
한인 유아사망률은 60%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