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 (프란체스코 알베로니)에서…
양심을 굳게 지키는 사람
몇 년 전 클라우디오 마그리스가 아주 멋진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그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절대 가치와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선과 악이 양쪽으로 정확하게 나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악마와의 계약이 제의되는 어떤 순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큰 이익 또는 우리가 열렬히 바라던
어떤 것과 교환하자는 제의를 받는 순간이 있다.
사랑, 부, 성공, 권력 같은 것, 어쩌면 우리 정당의 성공,
우리 재판의 승리 같은 것과의 교환일 수 있다.
스펜서 트레이시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맡은
미국판사를 연기하는
오래된 영화 「승자와 패자」가 기억난다.
피고인은 독일의 판사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던 아주 정직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치즘 초기에
그는 유태인들에 대한 최초의 허위 재판에 가담했다.
그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강제 수용소나
거기서 죽은 사망자들에 대해 전혀 몰랐고
사람들이 죽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할 때,
늙은 미국인 판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당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사람에게 죄를 내렸던 바로 그날,
그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 거요.>
그에게는 바로 이게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좀더 분명히해 보자.
우리는 실수나 경솔함 때문에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소질과는
정반대 되는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곧 그 사실을 깨닫고 이크~! 하는 생각으로
실수를 바로잡는다.
내가 말하는 결정은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그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관성 있게, 용기 있게 그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포기해 버리리라는 것도 안다.
그 길은 가장 쉽고 편해 보여 택한 것이다.
아니면 야심이나 욕심 때문에,
기회를 보느라고 택한 것일 수도 있다.
처음에 우리는 명쾌하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일에 휘말리게 되고 유혹에 빠지게 된다.
초기에 도덕적인 문제가
정말 도덕적인 문제였고 농담이 아니었다면,
이제는 딜레마로 변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게 된다.
한쪽에 선이 있고 또다른 쪽에 악이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것들은 언제나 둘 다 선하고 둘 다 중요해 보이는
선택 사항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을 때에만,
우리 자신에 대해 지독할 정도의 확신을 가졌을 때에만
더욱 진실되고 더욱 올바른 것을 포용할 힘을 갖게 된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광적으로 빠져드는 것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허약해졌을 때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 기만을 허용한다.
나치들은 유태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참았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폭력과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그를 변명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 부패 사건도 악마와의 계약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정의, 개혁, 정직에 대한 이상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법 자금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것 말고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가 아주 어렵고 힘들었다.
악은 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