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독립운동 때문에 3대가 쪽빡찬 성재 이시영 선생 집안

비타민님 2015. 1. 6. 18:21

잊혀진 옛 가요 50분 메들리(남 수련)


오늘은 필자가 어린 아이이던 시절(7살)에

우리 동네의 유일한 이층 집에 사셨던

우리나라 초대 이시영 부통령 이야기 입니다.

 

중국에는 오늘도 우맹의관(優孟衣冠)이라는 연극이 있는데,

내용은 중국 춘추시대 때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초장왕이 패자가 되는 데 공을 세운

손숙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청렴결백한 손숙오가 죽으니

그 자손들은 물려받은 재산이이 없어

그 아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팔아 생계를 유지한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궁정 배우 우맹이라는 사람이

손숙오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입고 초장왕 앞에 나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충신들의 자손들은 거렁뱅이가 되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데

탐관오리들의 자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뜻을 풍자하여 부른 노래입니다.

 

친일파 자식들은

자기 세상을 만나 온갖 부귀를 누리고 다니는데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치며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은

3대가 빌어 먹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의 초나라의 군주는 초장왕이라는 명군이 있어

손숙오의 자손들은 늦게 나마 그 보상을 받았지만

한국에는 언제나 그 날이 올른지 요원하기만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우맹의관(優孟衣冠)과 같은 연극이 공연되길….

 

구 한말의 부자이던 이 시영 선생의 집안은

선생의 형제 분들이 가산을 털어 독립 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죽음을 당하고 선생만은 살아남습니다.

독립 운동하다가 패가 망신에 국가에 인정도 못받은 예! 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시기 바람니다)

 

이시영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된 애국자이심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해서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했읍니다.

 

오늘도 선생의 후손들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서울 수유동에 있는 선생의 묘를 지키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인

서차희 여사가 북한산 국립공원 안의 낡은 집에서 32년째

시아버지의 묘소를 돌보며 살고 있다는 보도가 있읍니다.

 

여사가 거주하는 집은 붉은 기와 위에 검은 이끼가 잔뜩 내려앉고,

대문 옆엔 다 타버린 연탄 수십 장이 쌓여 있었다.

14평 남짓한 집에서 서 여사는 건강이 악화된 셋째아들(65)

소아마비를 앓는 막내딸(57)과 함께 살고 있었다.

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에게 지급하는

연금 월 80만원으로 빠듯한 살림살이를 잇는다.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이시영 선생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남겨주지 않았다"고 후손들은 전했다.

한때는 서울 중구 일대 2만평 넘는 땅이 선생 가문의 재산이었으나,

선생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그래서 선생이 부통령직을 그만둔 다음날부터

식구들의 끼니 걱정이 시작됐고,

죽으로 밥을 삼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선생의 가족사에서 비극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6·25전쟁 통에 피란을 간 부산에서

선생의 둘째아들 이규열(서 여사의 남편)씨가 병으로 숨을 거뒀고,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손녀딸은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 못하게 됐다.

4개월 뒤인 1953 4 17,

이시영 선생도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와

20년간 스무 번 넘게 이사를 다니며 셋방을 전전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가정에 물질적인 여유와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큰손자(서 여사의 장남) 4살 때 중국 상하이에서 숨졌고,

둘째손자 이종문씨는 경기고를 졸업했지만

생활고(生活苦)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셋째손자는 가난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나

중병을 안고 10년 전 귀국했다.

큰손녀 역시 경기여고·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현지에서 작은 수퍼마켓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32년 전, 서 여사는 이민우 당시 국회부의장이 내놓은 60만원으로

선생의 묘소로부터 150m 떨어진 곳에 집을 얻었다.

이후로 비가 오면 묘소가 무너질까,

등산객 담뱃불에 행여 묘소가 타버릴까,

아침저녁 노심초사하며 묘소를 지켜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그일조차 하지 못한다.

서 여사와 가족들의 마지막 소원은

국립묘지에 부통령 묘역을 조성해 이장하는 것.

그게 어렵다면 현재 북한산에 있는 묘역만이라도

국가가 나서서 관리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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