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보릿고개와 오늘의 현실 되돌아 보기(모신 글)

비타민님 2015. 6. 19. 05:20



보릿고개 의 사전적 의미

"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어려운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아니하여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가을 추수한 쌀을 다 먹어 식량이 떨어져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기가 보릿고개다.

 

보릿고개 배고픔의 직격탄을 맞은 주인공은 7, 80세대 들이고,

5, 60 연령대는 보릿고개 유탄 세대들이다.

불과 사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해마다 똥구멍이 찢어지는 태산보다 더 높은

보릿고개 를 힘겹게 넘어야 했던 그시절이 있었다.

 

음력 삼사월이면 지난 가을 수확한 쌀이 떨어져 풀떼기,

흰 쌀알 몇 개 뜬 갱죽(갱식이),

송기(소나무 속껍질),쑥 등 초근목피(草根木皮)와 쌀겨등으로 연명하며

보리가 고개 숙이기를 기다리며 시쳇말로 개고생의 나날로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그 시절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뛰지 마라 배 꺼진다.'

많이 움직이지 말 것을 주문했다.

고픈 배를 쑥, 풀뿌리, 송기등 강한 섬유질을 섭취 하다보니

 변이 딱딱하여져 배변시 똥구멍(항문)이 찢어져서 고통을 받았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다란 말은 보릿고개를 상징하는 말이다.

보릿고개 시련에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레지는 부황(浮黃)병은 다반사고

깡마른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고 머리는 기계충이 생겨

일명 영구머리 어린이들이 많았던 그 시절 그때는

밥을 얻어먹는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옷이나 머리에 기생하는 머릿이를 잡는 풍경도 그 시절의 풍경이었다.

그 시절 인사말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

'진지 드셨습니까?’라고 안부를 물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어렵게 연명하던 때라 자고 일어나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고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

 

점심때면 배가 고파 운동장가 두레박 우물가에서 물배를 채우던

그 시절이 반세기 전의 일로 먼 얘기가 아니다.

반세기만에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변신한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은 옛날부터 잘 사는 나라로 착각 속에

보릿고개란 말조차모른다.

그때와는 별천지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든다.

 

해마다 보리가 고개를 숙이는 오월이면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그 시절의 이웃들이 그리워지고

배고파도 마음만은 순수했던 그 시절이 그리운것은 인지상정일까?

 

깜장 바지저고리, 깜장 고무신, 깡마른 얼굴의 마른버짐 투성이,

까까머리엔 기계충 흉터( 일명 영구머리)로 얼룩진 소년이 걸어가던

유년시절 학교 길의 청보리밭 소릿길의 추억이 너무 진하여

반세기가 지낫건만 눈 감으면 진한 추억으로 묻어난다.

 

당시는 가정마다 의식주에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생산하여 충당하는

자급자족 경제였기 때문에 오일장이 열려도

농수산물 거래가 주였지 공산품은 거의 없었다.

 

양잿물, 고무신,연필,백로지(갱지) 등이 당시에는 주요한 공산품이었다.

농경시대가 공업화 되면서

식량의 대량 수입과 통일벼 등 벼 품종개량과 비료·농약의 공급확대 등으로 식량증산에 힘써 

1970년대 중반에 식량의 자급자족으로

보릿고개도 혼식도 서서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해마다 보리가 고개를 숙이는 5월이면 배고픔이 뭐 자랑이라고,

 보릿고개 추억을 떠올리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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