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우물가에서 쉬는 모세와 정의(正義)-모신 글

비타민님 2015. 9. 8. 17:49

아모스 5 24.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언젠가 이 구절을 생각하며  "정의란 무엇일까?"하고 생각을 해 보았었다.

그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행한 정의와 판단이

오히려 역풍으로 되돌아와 가정과 사업이 어려웠던 시기였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못한 마음 속 고백이 있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곧 아버지의 정의이고, 나는 그 정의를 믿는다고...

비록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25년 전의 나의 이야기이고 오해와 시련이 많았던 시기였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5 : 14,… 24)"

    

 

옛 유대 랍비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자질은

반드시 “정의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이를 실천하는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평소에는 겸손하고 평화롭지만 불의를 보았을 때는 가만히 있지 않고

정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싸우는 사람이 참 지도자라고 믿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다.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자랄 때 한번은 궁 밖에 나갔다가

애굽사람(노동감독)이 노예(히브리사람)를 부당하게 학대하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애굽사람에게 좋은 말로 그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히자,

모세는 달려들어 애굽사람을 쳐죽여 땅에 묻어버렸다.

그러나 다음 날 같은 곳에 갔다가

이번에는 어제 자기가 도와주었던 히브리사람이

같은 히브리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왜 같은 동포끼리 싸우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러자그는 언제부터 네가 우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재판관이 되었는가? 하며

대들었다.

 

    모세는 불의를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애굽이 비록 부강한 나라지만 불의가 넘치는 것을 보고 분노한다.

동시에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의롭지 못한 사람들인 것을 보고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는 애굽사람을 피하여 미디안(아라비아)으로 도망간다.

미디안에 간 모세는 어떤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한 떼의 양을 치는 목자들이 와서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

그런데 처음 온 양떼는 여자 목자들이 데리고 왔다?

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또 한 떼의 양들이 왔다.

이번 양떼는 남자목자들이 몰고 왔다.

남자목자들은 앞에서 물을 먹이는 것이 여자목자들인것을 보고 달려들어

앞에 있는 양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의 양에게 먼저 물을 먹이려고 했다.

여자목자들이 대들었지만 남자들의 힘을 당 할 수가 없었다.

모세는 여기서도 불의가 판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모세는 달려들어 남자목자들을 좇아내고 먼저 온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

이 일로 모세는 양떼 주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이나 노동수용소나 이스라엘 공동체나

미디안의 우물가에도 정의가 있어야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믿는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며,

이 세계가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젔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정의를 지키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자들로부터 해방되어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토라에는 노아의 이야기가 있다.

노아는 세상이 혼란하고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정의를 지키며 의롭게 산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할 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지켜주셨다.

노아의 의로움이 무엇 이었을까?

노아는 세상의 유혹들을 물리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즉 노아의 이야기는 책임을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랍비들은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돌면서도

유대인으로 자존심과 존경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노아나 요셉이나 모세 같은 조상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들려준다고 한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정의란? 실천적인 정의를 주로 말한다.

예언자들의 가르침 중에는 국가적인 정의 등에 대한 교훈도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람끼리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를 말한다.

주로 인간관계에서 올바름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노아시대의 범죄는 주로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또는 재산 등을 빼았고 약은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것 같은 것이다.

대신 약자나 이방인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친절하게 하는 것을 정의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정의를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즐겨한다고 한다.

 

어떤 랍비가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매일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겨우겨우 살았다.

그러나 토라를 열심으로 연구하고 또 덕이 높아서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마침 랍비가 좀더 토라를 연구하려고 당나귀를 사기로 했다.

그는 아랍상인으로부터 당나귀를 샀다.

그런데 개울 가에 가서 새로 산 나귀를 씼는데

나귀의 목에 장식한 줄 속에 아주 귀한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자들은 너무 좋와했다. 다이아몬드를 팔면,

앞으로 나무를 해서 팔지 않아도 되고 대신

제자들을 가르칠 시간도 더 많게 되었다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랍비는 제자들에게 바로 나귀를 판 아랍사람에게 돌아가서

다이아몬드를 돌려주라고 호령했다.

제자들은 “선생님이 산 당나귀가 아닙니까?” 라고 하자,

랍비는 ” 나는 당나귀를 산 일은 있지만 다이아몬드를 산 일은 없다.

나는 내가 산 것만을 갖는 것이 정당하지 않느냐?

제자들은 할 수 없이 아랍상인에게 돌아가서 사실을 말하고

다이아몬드를 돌려주자 이번에는 아랍상인이 거절한다.

이유는 나는 당나귀를 팔았을 때 나귀에게 붙은 것도 팔았으니

이제는 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랍비는 “ 유대인의 전통은 산 물건 외에는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이것을 당신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 아랍상인은 “당긴들이 믿는 신은 훌륭한 신임에 틀림이 없읍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무드는 “풍족한 사람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