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게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는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 乙丑 8월
29일 밤 -
바람도 없는 공중에서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 시가 하고 있는 말은 단순하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른다는 것을 스님은
‘모른다’ 하지 않고 ‘알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 어조의 부드러움과 고즈넉함과 온순함과 겸허함이
‘모름’의 고백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이 시의 마침표는 바로 ‘알 수 없어요’라는 말에 있다.
이걸 제목으로 적어놓지 않았다면 스님의 시는 미완성이다.
‘알 수 없어요’ 라고 답을 제시한 것 같지만,
그리하여 문을 닫은 것 같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시인은 이것으로 또 다른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 문을 다 열고 그 문이 열어놓는 명상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소임의 임자는 바로 우리다.
‘알 수 없어요’—이 다섯 글자는 명상에의 초대가 아니고 무엇이랴.
‘옴 마니 팟메 훔(연꽃 속의 보석이여)’처럼 이 다섯 글자는
나의 눈길을 책에서 창 밖의 잎과 하늘과 꽃향과 나비로 향하게 한다.
-모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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