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따르는 이야기♥

가짜 신앙의 종류 -영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아더 핑크- (1886~1952)

비타민님 2012. 7. 22. 05:52
 

가짜 신앙의 종류

-영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아더 핑크- (1886~1952)

 

(1) 가짜 신앙의 종류

 

그들 스스로

자기들은 구원에 이르는 바로 신앙을 소유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간주하고,

심지어 분별의 영을 가진 사람들조차 충분하다고

인정해주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 시몬 마구스가 그런 경우인데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8:13)

 

그러한 믿음을 그도 가졌었고 믿음을 표현 했었기에

빌립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독특한 특권들을 그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나 잠시 사도 베드로가

그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되었도다.

( 8:21,23) 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함유된 모든 진리를

그가 알게 되는 믿을 수도 있고,

오히려 순수한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의 진리를 수도 있다.

많은 시간을 성경연구에 들임으로써

그의 믿음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다뤄보지 못한

많은 진리들을 소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지식이 증대되면 수록 그의 믿음도 점점 풍성해진다.

이런 종류의 믿음으로 그는 사도 바울이

다음의 성경구절에서 언급한 믿음에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쫓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믿으며”( 24:14)

그러나 구절이 그런 사람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반대하는 예가 아그립바 왕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아나이다.( 26:27)

 

여기서 당신이 만일 단순한 역사적 믿음을 넘어서는

믿음을 보이라고 요구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제시할 밖에 없다.

성경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있는데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긴 해도

인간 본성의 산물이 아닌 성령으로부터 믿음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요소들은 교육과 자력에 의하여 산출될 없는 것이다.

 

가지 요소는

신령한 비췸과 믿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신적인 능력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아도 하늘로부터

조명을 받을 수도 있고 영적인 일에 마음을 기울일 있다.

 

히브리서 6:6 사실을 입증해 준다.

 

거기서 우리는 배교자들에 대하여 읽는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없나니”

 

사람들은 “비췸을 얻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신령한 것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신령한 것에 마음을 기울였고 그것을 환영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에 참예한 자”들이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신적 기원을 가진 믿음을 소유할 있다.

그리고 믿음 특유의 능력을 경험하며

믿음을 삶의 토대로 삼을 수도 있다.

그들의 믿음의 기반은 신적 증거일 수도 있으며

그들은 부동의 확신을 가지고 기반 위에서 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이

합리적이고 확실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바로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 존재의 기반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성경을 믿는 믿음은 신적인 믿음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믿음을 가졌었는데

그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로부터 건짐을 받은

광야생활 동안에 그런 믿음을 가졌었다.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성이 야훼를 경외하며 야훼와 모세를 믿었더라”( 14:31)

 

그러나 그들 다수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졌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3:17,18)

 

점을 좀더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표현한 부분들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13:11 보면

하나님께서 “나 야훼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분을 ‘의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왕하 18:5,6 보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그가 야훼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그런데 동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악한 백성이 듣기를 거절하고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띠의 쓸데없음같이 되리라”( 13:10)

 

견고한 의뢰를 나타내는

다른 단어로 ‘머무르다'(stay)라는 말이 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야훼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26:3)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며 이름이 만군의 야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48:2)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고 누가 의심하랴?

, 그러나 너무 속단하지는 말자. 동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목의 힘줄은 무쇠요

이마는 놋이라”( 48:4)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다른 표현으로 ‘기대다’(lean)라는 말이 있다.

단어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존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에도 쓰인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8:5)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 표현을 있을까? 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가능성을 인정하고 계신다.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말을 들을지어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야훼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야훼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3:9,11)

 

육적이고 세상적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떠받쳐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자기들은 지옥에 떨어질 없으며

어떠한 ‘재앙’도 자기들 위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무서운 착각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태도도

자체로서는 중생의 증거가 없다. 분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유다왕 아비야이다.

여로보암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그와 맞섰을 때에

아비야가 역대하 13장에서 말의 내용은

무게가 있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소금 언약으로 다윗과 자손에게 주신 사실을 상기시켰다.(5)

다음으로 그는 그의 대적 여로보암의 죄악상을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야훼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과

야훼께서 자기와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심을 확실시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전쟁을 강행하였다.

결과 아비야와 백성이 (그들을) 크게 도륙하였는데

그것은 저희가 열조의 하나님 야훼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비야에서 대해서 말하기를

 

“아비얌이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다” 한다.

(왕상 15:3)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의지할 있고,

또한 그의 약속을 의지하며 그의 언약을 주장할 수도 있다.

 

“위협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반대는 안과 , 양쪽에서 일어난다.

안으로부터는 위협의 메시지를 속에 죽음이 맛이 담긴

쓰디 알약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밖으로부터는 사단이 반대를 조장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단은 위협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일깨워

자신들의 비참상을 깨닫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재의 비참상을 벗어날 방도를 궁리할까봐 두려워한다.

사단은 위협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평화와 행복의 몽상에서 깨울까봐

그들이 사단의 아가리 안에서 잠자고 있는데도 안전하다고

확신시키며 위협의 메시지를 멀리하도록 공작한다.

 

그러나 약속의 메시지를 전하면

일반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는다.

사람 내부에서도 반대가 일어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약속은 매우 달콤하고 자비와 영생을 약속함이

바로 복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속의 메시지를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단도 직접적인 반대를 일으키지 않고

사람들이 차라리 약속의 메시지에 흥미를 갖도록 공작한다.

왜냐하면 방법이야말로 사람들을 그들 본래의 상태에 묶어두고

정주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약속의 메시지를 악용하여

죄악의 무덤 속에 안치되고 썩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다고 확신시킨 무덤을 인봉해 버릴 것이다.

 

그럼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주었듯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운 메시지를 받아들일 있다면,

그런 반대와 어려움이 없을 복음의 약속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데이비드 클락슨)

 

비록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아니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볼 있다.

그들은 “잠깐 믿다가 배반하는” 짝밭 같은 사람들이다.( 8:13)

주님께서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셨다.

( 13:20)

 

우리는 이런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는 영혼들이며,

충일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며,

또한 자기들이 발견한 지상의 행복 세계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도록 애쓰는 열심덩어리들이다.

이런 사람과 순수한 그리스도인들,

좋은 밭의 사람들을 가려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이의 차이점은 명백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차이점이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뿌리가 없는데( 13:21),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깊이깊이 파보아야만 한다.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