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따르는 이야기♥

성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 아더 핑크 –(1)

비타민님 2012. 7. 22. 06:29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 (1) 성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우리를 기념하신 .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자주 잊는 것에 비할

놀랄 만큼 은혜로운 대조이다.

우리의 다른 모든 기능이 그러하듯이,

기억력 또한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부패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없는 것은 곧잘 기억하면서도

가치 있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있다.

대단치도 않은 동요나 어렸을 들은 노래는

우리의 무덤까지 따라간다.

반면에 정작 기억해야할 설교 말씀은 24시간 이내에 잊고 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이고 심각한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도 쉽사리 하나님과

그분의 헤아릴 없는 긍휼을 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신실하게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성구 사전을 찾아보게 되면,

“기억하다”라는 말이 나오는 처음 다섯 구절 모두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8:1),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9:16),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라.

( 19:29) 등의 구절들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말이 인간과 관련하여 처음 등장하는 구절의 내용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잊었더라.( 40:23) 것이다.

 

 

애굽에서 벽돌을 굽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야말로 비천한 놓여 있었다.

노예 민족으로서 무자비한 감독의 채찍 아래 신음하였으며

하나님을 모르고 가혹하기 이를 없는 왕에게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길이 어디에도 없던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려다 보셨으며

그들이 고난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가운데 있는 그들을 기억하신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출애굽기 2:24,25에서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

이스라엘이 겪어야 비참한 상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19세기에 그들이 겪은 것만큼이나 두려운,

가장 어두운 밤의 시간이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은혜의 때가 끝나고 나면,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노예 시절에 겪었던 것보다

훨씬 맹렬한 심판을 받게 것이다.

“대 환난”의 때에는 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임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아래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라”( 30: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다

( 26:42,44 ).

 

그러나 성경 말씀이

문자 그대로의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해당된다( 6:16).

오늘날 구원의 때에 살고 있는 성도들

또한 “우리를 비천한 데에서 기념하신이”와 연결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비천한 데”에 놓여 있었던가!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는 비참하고 참혹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도울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은혜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의 강한 팔을 펴서 우리를 건져 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 오셔서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10:33).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있는 것이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40:2)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는가?

“기억하다”라는 말은 이전에,

우리에게 향하신 사랑과 긍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본질적으로 부패된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도 그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언약은 우리의 언약의 보증( 7:22)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 전부터 맺어진 언약이었다.

이것은 디도서 1:2 있는, 영생에 대해 약속하고 있는 말씀과 같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1:4) 것을

기억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실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처음 경험하는 이상의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서 거할 때에도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은,

성도가 험악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경험해야 것을 미리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공급해 주신 것에서 드러나며,

이것은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인생길에

그의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시겠다는 사실을 예시해 준다.

 

 

현재 땅에서의 우리의 신분은 외로운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가 노릇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억하시며

시시때때로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

우리가 언제나 높은 위치에만 머물러 있게 되어 있지는 않다.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고

우리의 경험도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밝고 화창한 날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흐린 날이 있게 마련이며

여름이 오면 겨울도 온다.

살다 보면 좌절과 실패와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침체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때로, 우리가 친구의 위로를 가장 필요로 ,

그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때일지라도 우리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자신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13:8)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 여기가지 읽은 분들 중에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경우에도 적용해 보려고 것이다.

우리가 첫사랑에서 떠나 마음이 냉랭해지고,

생활이 다시 세상적이 되어버린 경우이다.

안타깝게도 다시 타락한 상태에 놓이게 것이다.

그렇다면 경우야말로

우리가 비천한 놓인 경우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신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시편 기자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23:3)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을 다른 경우에도 적용해 있다.

 

 

경우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지막으로 맞게 되는 커다란 위기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의 활력이 점점 줄어들어 생기가 사라지는 역시,

우리가 비천한 놓였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신다.

왜냐하면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곤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절호의 기회이다.

그분의 능력은 우리가 약할 때에 온전하게 나타난다.

그럴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셔서

위로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