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이 포스팅은 필자에게 공감을 주는 글이라서 복사 를 합니다..
오늘 처가에서 집으로 오는 아내에게서 많은 가정사의 열매를 얻습니다.
필자는 쉽지않은 결혼과 가정사가 많아으나
나의 하나님이 다 해결하여 주심에 감사와 찬양 밖에는 없습니다..아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가 않다는 말이죠.
목회자를 평가할 때도 그가 쓴 신학 논문을 보거나 설교를 듣는 것 보다는,
그가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생각이나 말보다는 행실이 그 사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6-17)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의 근본을,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3번에 걸쳐 사도행전 2장 말씀을 중심으로,
오순절에 성령이 내려오실 때 나타난 3가지 이미지,-불, 바람, 혀 - 를 통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변화를 통해
우리 삶에 열리게 되는 열매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 5:22 말씀,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열매들을 그리스도인의 열매, 혹은 신앙의 열매라 하지 않고
왜 성령의 열매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내가 노력했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그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고,
우리는 그 열매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임을 먼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크기나 색깔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기쁨의 사람으로, 화평의 사람으로, 인내하며, 친절하고, 선하며,
신실하고, 온유하게, 절제하는 사람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전체를 단 두 마디로 요약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 한 마디로 줄인다면 사랑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주제요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성령의 열매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습니다.
1-1. 여자는 그 남자에게서 사람을 사로잡는 힘,
카리스마가 넘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자기만을 내세우고 너무 뻐긴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1-2. 남자는 그녀가 작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볼품없고 허약하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2-1. 여자는 생활력이 강하고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그 남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당신은 일밖에 모른다고 하면서 미워합니다.
2-2.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당신은 갈수록 점점 우리 엄마를 꼭 닮았간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3-1. 여자는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는 이유로 그 남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현실적이지 못하고, 사랑 타령만 한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3-2. 남자는 흐트러짐이 없고 분별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내 아내는 고리타분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인간들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사랑하기 이전과 이후가 서로 다릅니다.
똑 같은 조건이 사랑하는 이유가 되었다가, 어느새 미워하는 이유로 바뀝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을 통해
내가 무엇인가 혜택을 받고 누리려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상 살아보니까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뜨거웠던 사랑은 한 순간에 얼어붙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결같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런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조건에 따라 변하는 사랑, 얻고 챙기려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은 사랑,
조건 없이 내어주는 사랑 말입니다.
어디서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내게 주고 계십니다.
내 조건을 따져보신 뒤에,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어떤 때는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옆에 바싹 붙어있다가도,
또 어떤 때는 나 몰라라 하면서 고무신 거꾸로 신기가 일쑤인 변덕장이입니다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게서는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편단심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떨어져 있지 못합니다. 함께 있고 싶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고 싶어 사람의 몸을 입고 나에게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게 오신 예수님은 마음을 주셨을 뿐 아니라, 몸을 바쳐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다가 아주 간곡한 유언을 남기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 이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모델로 삼고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그냥 하늘 높은 곳에 앉으셔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몸을 움직이셨듯이, 우리의 사랑 또한 움직이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계십니까?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 4:20).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듯 사람을 향해 자기의 몸을 움직여 나가는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내 주위에 나의 사랑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은 사람이 있습니까?
참 잘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현재 나의 사랑의 손길을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을 향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하는 은사, 영을 분멸하는 은사, 방언을 말하는 은사 등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언급한 후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어서 고린도전서 13장, 그 유명한 사랑장이 등장합니다.
사랑 장의 첫 머리말은 이러합니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온갖 성령의 은사보다 더 큰 은사,
가장 크고 좋은 은사가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결혼식 때 자주 선포되는 말씀, 그 사랑장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방언, 예언, 지식, 믿음, 자선, 헌신, 그 어떤 은사를 갖고 행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허사랍니다.
사실 성령의 나머지 8가지 열매들도
이 사랑이 없으면 맺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사랑은 온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골 3:14).
지금 제단에 촛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를 통해 빛을 얻지만,
그 빛을 주기 위해 초는 자기 스스로를 태워야 합니다.
어느 해, 아주 추운 겨울밤,
연료가 떨어져서 방안의 난로는 꺼지고,
난로위에 떠 놓았던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몹시 추웠습니다. 그 때 촛불 하나를 켰습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릇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촛불 하나,
그러나 그 촛불 하나로 난로를 때지 않아도 기나긴 겨울밤,
방안에 물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방에 촛불 하나만 켜두면
실내 온도가 결코 Minus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를 태워 너를 녹여주고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는 일 –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촛불 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 - 그가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난 주간에 조국와 독일에서 전해지는 뉴스는
아프게도 하고 희망을 갖게도 했습니다.
따돌림을 당한 동료에 의해 죽임당한 자식의 시신을
혼절한 채 통곡하며 좇아가는 어미들을 보았습니다.
1년이 넘도록 크레인 위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해고 노동자를 향해 달려가는 희망버스를 보았습니다.
유럽연합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북한 동북부 지역 주민 65만 명에게
약 155억원 규모의 긴급구호식량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북한주민들을 위해선 반가운 일이지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폭력으로 누르고 군기로 잡을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노동과 삶은 시장의 상품처럼 재고 처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합니다.
한 인간의 생명과 생존권은 정치와 외교의 타협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는
신성한 것임을 우린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린 이제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병들게 하고 죽음을 향해 치닫게 하고 있는지.
이 사막같이 황량한 문화에, 이 얼어붙은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작은 촛불 한 자루처럼 타오를 수 있다면
누군가 외롭게 고통당하고 아파하다가 죽고, 죽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사랑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턱 없이 부족해 보인다 해도,
중요한 것은,
세상의 희망이 아주 꺼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온기라도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열매를 맺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고,
성령의 첫 번째 열매,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 사랑의 힘을 회복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1구역 식구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정성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멀리 가지 읺더라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