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인 틀 속에서 무반성적으로 사는 삶이란
우리의 주위에서 많이 접하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플라톤은 매우 많은 책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대부분 제자 플라톤이 남긴 기록 덕분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비유적인 이야기로 설명하는
재능의 철학자입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국가’라는 책에 들어 있는 ‘동굴의 비유’ 포스팅 입니다.
“우리의 성향을 이런 처지에다 비유해 보게나.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국가’ 중에서
동굴 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동굴 벽만 쳐다보도록 묶여 있습니다.
뒤에는 불이 피어 있고 그 앞으로 여러 모양의 인형들이 지나다닙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벽에 비친 인형의 그림자뿐입니다.
그림자를 진짜(real)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우연히 포박을 끊고 동굴 밖에 나가게 됩니다.
‘진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평생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들이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이제 진실을 안 그는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갑니다.
동굴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아직도 그림자를 실물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진실을 전하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환영과 감사가 아니라 비난과 욕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중략)
그렇지만, 만약에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도 눈이 제 기능을 회복도 하기 전의 시력이 약한 때에
그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게 될 것 입니다.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될검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국가’ 중에서
밝은 곳에 있다 갑자기 어두운 동굴 안으로 들어오니
더듬거리며 앞을 잘 보지 못했나 봅니다.
역설적으로 진리를 깨달은 이후,
그는 오히려 일상적 삶(동굴 속 생활)에 더 서툴러졌습니다.
동굴 속 사람들이 그를 못마땅해한 것도 이해는 갑니다.
아마도 이렇게 투덜거렸겠죠.
“우리가 지금껏 속아 왔다고? 자신만이 진리를 안다고?
앞도 제대로 못 보고 저렇게 비틀거리는 사람이?”
동굴 속 사람들은 지금 스스로가 무지한지 모릅니다.
평생 봐온 그림자를 두고
가짜니 거짓이니 말하는 사람이 곱게 보였을 리 없습니다.
조금씩 불만을 토해내던 이들 중 누군가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저 사람을 죽여 버리자!
마치 소크라테스를 고소하고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들처럼….
진리를 남들보다 먼저 깨닫고 그것을 전한다는 건
정말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인 듯합니다.
우린 이 이야기에서 진리는 감추어져 있으며,
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실제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플라톤은 이 세계를 ‘현상계’라고 부릅니다)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데아(idea)라는 진리는 ‘형상계’라는 곳에 있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두 세계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가상세계와 실제세계가 구분되어 있는 것 입니다.
이를 두 세계론(two-worlds theory)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계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나
언젠가는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완전한 실현 상태 의미합니다.
철학이나 학문의 목표, 나아가 윤리적 실천의 목표는
이런 실재자들에로 나아가는 것이며,
실재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수인의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상식적인 틀 속에서 무반성적으로 사는 삶이란
그림자의 세계에 안주하는 삶인 반면,
철학적인 삶이란
빛 속에서의 삶 또는 빛 속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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