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정치 경제가 불안정하고 변동이 심한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45년 전에 정착한 해외 동포이다.
오늘 신혼 중인 막내 내외가 과로한 직업에서 휴식도 하며
처가집에서 경영하는 의류점의 모델 선정 견본 수집을 위해
브라질의 샹 파울로에 며칠 휴가 여행을 간다고 한다.
필자도 이민 초기에는 의류업 주축이 유태계인들의
의류업 생산자의 하청업을 거의 10여년간 했다.
몸에 익지않은 옷 제품 만들기 중노동을 했다.
옷 한벌 만들면 얼마를 받는 숫자 놀이 생산 품 파는 노동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복과 발목이 붓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호경기인 시절이라서 한달 일을 하면,
일년 먹을 쌀을 살 수가 있던 시절이었다.
품팔이 하청업을 하다가 독립해서 조그만 의류상을 했다.
이 나라에도 많은 의류의 등록 상표가 있지만
한인의 주종업인 의류업계엔 한인 등록 상표가 거의 없다.
이 나라 의류업을 잠시 밀어두고,미국 의류업을 간단히 전해 본다.
미국 의류업계에서는
`미국 최대 브랜드`만이 유태인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미국 최초 브랜드` 역시 유태인 몫이었다.
약 150년전인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를 지배한 단어는 `골드러시-금광 열풍`였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황금 노다지를 찾아 서부 캘리포니아로 달려갔다.
샌프란시스코는
이처럼 한두해 사이에 갑자기 모여든 30만명이 만들어 놓은 도시이다.
하루아침에 서부의 뉴욕이 생겨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1850년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든 골드러시 인파에 끼었던 사람중 하나가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3년전인 1847년 18살의 나이로 독일에서 이민온
포목장사의 유태인 7남매중 막내였다.
뉴욕에 상점을 차린 형제들은
켄터키주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목을 팔았다.
리바이도 금을 캐러가 아니라
금캐는 광부들에게 포목을 팔러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리바이에게 광부들이 요청한 것은
포목보다 작업 바지였다. 직업상 두껍고 질긴 바지가 필요했던 탓이다.
선천적인 장사꾼이었던 그는 곧바로 바지 생산에 들어갔고
텐트용 천으로 만든 바지에 착안을 하고
그가 만든 텐트용 천의 질긴 바지는 광부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해서 1953년 `리바이스(Levi`s)`란 청바지 브랜드가 처음 나왔다.
미국 최초의 의류 브랜드인 `리바이스`는
최근 150주년 행사를 성대히 치르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여생을 마친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 유태인 사회의 대부였다.
유태인은 물론 비 유태인들에게도 자선활동을 많이 한 탓에
시 정부는 1902년 그가 죽자 장례식이 열리는 날을 공휴일로 선포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미국 의류산업의 `최초`와 `최대`만 유태인의 것이 아니다.
캘빈 클레인(Calvin Klein), 게스, 조다쉬, 앤 클레인, 도나 카란, DKNY,
토미 힐피저, 케네스 콜, 리즈 클레이본, 아버크롬비&피치,
빅토리아 시크릿, 존스 뉴욕, 나인웨스트등
수많은 유명 브랜드들이 유태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갭(GAP)의 창업주인 도날드 피셔도 유태인이고
니만마르쿠스 삭스피브스등 주요 백화점들의 패션 디렉터들도
대부분 유태인들이다.
이처럼 미국 유태인들이 의류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유태인 박해로
동부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의 미국 이민이 봇물을 이뤘다.
이들 유태인 이민자들이 미국 이민의 창구였던 뉴욕에서
당시 한창 붐을 타기 시작한 의류산업의 노동력을 제공한 것.
1880년 이후에만 2백만명의 유태인이 집중적으로 뉴욕으로 넘어왔고
이들은 노동집약산업인 의류업계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유태인 노동자의 60% 이상이 의류업계에 종사했을 정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류회사의 경영도 대부분 유태인들이 맡았다.
1890년 경에는 뉴욕 의류공장의 95%를 유태인이 장악했다.
이 비율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20세기초까지
철강 석유와 함께 3대 산업으로 불리던 의류산업 종사자의 50-80%는
유태인 이었다.
유태인들의 의류산업을 주도하면서 새로 생긴 현상은
그 이전까지 `주문 및 가내 생산(Home-made)`위주였던 의류제품이
`레디 메이드(Ready-made)`시스템으로 대체되면서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유태인인 윌리엄 및 이다
조젠탈 부부가 1923년 최초로 현대식 브래지어를 만들어
대량생산에 들어간 것도 그런 흐름에서 창조된 `작품`으로 볼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류산업의 생산부문에서 유태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낮아져 갔다.
1920년대에는 50%선, 20세기 중반에는 30% 아래로 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창조적인 감각이 탁월한 유태인들은 생산분야보다
`돈이 되는`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바꿔나갔다.
맨해튼의 유명한 패션스쿨로 캘빈 클레인이 졸업한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유
태인들의 자금으로 성장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볼수 있다.
미국 의류산업과 패션디자인의 역사는
곧바로 유태인의 미국 이민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그런 각도에서 보면 랄프 로렌을 필두로 하는
유태인 디자이너들의 성공도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다.
아르헨티나의 의류업 종사 한인들은 어떠한 시류에 합승을 하고 있는지?
나라는 외채와 재정적자로 인한 생산력 감소와 조세 압력이 인플레를 초래하고
일부 교민은 깡통 중국 밀수(콘테이너)와 무허가 생산에 의존하며
잘 나가던 생계업이 불경기에 허덕임을 보고 있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급변 다양화하는 시대에 한인의 직업도 다양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적자 생존의 원칙이 우리 이민 생활을 목조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물간 의류 생산 판매업에 생존 경쟁을 해야만 하는 궁금증에
한번 적어보는 앞뒤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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