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의 행복론에서-
세네카에 의하면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
완전히 조화로운 이성(이것은 신적 이성의 일부이다)은
개인으로 하여금 인간 의지와 독립해
존재하는 세계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니게 한다.
인간은 인내, 절제, 용기를 통해서 최고선에 도달한다.
이러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빈곤이나 고통
심지어 노예 제도나 죽음 조차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성적이고 신적인 우주 안에서는
만유가 생명체들의 이로움을 위해 존재하지만,
반면에 물질적 복지에 대한 추구와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악과 죄악이 출현한다.
세네카는 이 관념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모순,
즉 불멸하는 영혼과 사멸하는 육체와의 대립으로 변형시켰다.
인간은 오로지 신에 의지함으로써만 선에 이를 수 있고,
관능적 욕망과 물질적 대상들을 정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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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eca De vita beata 행복론 - 제 1장 : 1
행복해지고 싶다 -
이 말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이 처럼 분명히 정의되어 있지 않은 말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천명에 한 사람도 어디에서 행복이 오는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암중모색하듯
무작정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둘러 잘못된 길로 발을 들여 놓음으로
써 갈수록 당초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를 알고,
둘째 “어느 길을 가면 가장 빠른가?”를 살펴야 한다.
바른길을 가면 우리는 하루하루 나아지지만
반대로 곁길로 접어들면,
다시 말해서 바른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면, 곧 미궁에 빠져
언제까지나 방황과 착오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유능한 길잡이를 갖는 일이다.
특히 이 경우에는 실제로 여행을 떠나는 경우와 달라서
따로 길이 있는 것도 아니며,또 길을 가기만 하면
안식처가 나타난다고 장담할수도 없다.
보통 길이라면 설사 잘못 찾아들었다고 하더라도
부근에 사는 사람이 바른길을 가르쳐줄 수도 있고,
또한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밟고 간 발자취가
위태롭기 짝이 없으며,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길을 가르쳐주기는커녕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헤메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들이 떼를 지어 가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보다는 이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이끌어 나아가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패배의 연속으로,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넘어지고 그 다음 사람이 그 위에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이게 된다.
이와 같은 잘못은
곧 “군중이 진리와 정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군중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행복한 생활은 결코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다수가 찬성한다는 것은 그릇된 의론이며,
일반 사람들은 관습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맹신하기 쉬우며 결코 좋고 나쁜 것을 검토해보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군중은 반드시 찢어진 신발을 질질끄는
비속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이다.
나는 군중이라는 말을 눈에 보이는 외관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사물을 올바로 판단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삼고 사용하고 있다.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