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악법도 법인가 2008.08.05 ㅣ 넷에서 발췌한 글
* 예전 글을 오늘 복습을 한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출신 철학자로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신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말은 종종 인용되며,
‘악법’에 저항한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때
비판의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당시에는 민주주의가 꽃피웠던 시대다.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됐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제도가 발전했다.
‘민주주의’는 국가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기본권이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이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소극적으로 ‘침해받지 않는 권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했다.
말 그대로 ‘시민의 자기 지배’로 이해한 것이다.
지금보다 어떤 점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시대인 것이다.
여성과 노예들, 아이들을 시민에서 배제한 것은
지금보다 뒤떨어진 부분이지만
시민들의 자기 지배를 철저하게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는
훨씬 앞서 있다.
지금도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현대화시켜서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려 노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시도가 성공한다면
현대 민주주의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했다.
당시 아테네 사회는 정교일치인 사회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할 듯하다.
혹은 ‘국가전복을 기도한 행위’ 정도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당시에 최대 이슈였던 것 같다.
시민 배심원만 500명이 넘었다.
당시 재판은 고발한 사람이 검사가 되고,
고발된 사람이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배심원이 판사인 셈이다.
최고의 웅변가이자 현자인 소크라테스가
이 재판에서 질 것이라 생각한 아테네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듯싶다.
이 재판 과정은
플라톤이 쓴 ‘변명’을 읽어보면 아주 잘 나와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구성하고 있다.
이 변론에서 당대 최고의 현자라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아주 조목조목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다.
소크라테스의 그 뛰어난 논리를
내가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진리를 외면하게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에 빠지게 되니
엘리트 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재판하는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
민주주의 제도의 전복을 주장했다.
아주 설득력 있게 선동했다.
아직까지도 변론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배심원인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뛰어난 언변에 설득되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민주주의는 선동에 의해 중우정치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 아테네 시민들은 스스로 그 선동에 빠지지 않는
현명함을 보임으로써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입증한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선고되자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신다.
그렇게 그의 죽음은 역사에 기록됐다.
소크라테스와 절대적 기준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판단의 절대적 기준을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바람이 불 때 사람들은 따뜻하게 느껴지면
따뜻한 바람이 분다고 생각하고,
차게 느껴지면 찬 바람이 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바람이 불 때,
나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지지만
당신에게는 차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나에게는 따뜻한 바람이 불지만,
당신에게는 차가운 바람이 분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한다.
당신과 나는 같은 바람을 쐬었다.
당신과 내가 어떻게 느끼던
내가 쏘인 바람과 당신이 쏘인 바람은
다른 바람이 아니라 같은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그 바람은 찬 바람인가, 아닌가.
나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그 바람 자체가 찬 바람인지, 더운 바람인지를 묻는다.
이를 통해 나에게가 아니라, 당신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통용되는 절대적 기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판단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의 온도를 가지고
사람마다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누구는 춥게 느끼지만 누구는 덥게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같은 온도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느끼며,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느낀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인정하여 상황에 따라,
구성원에 따라 온도를 조절한다. 그
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차이를 부정한다.
춥고, 더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소피스트와 민주주의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다.
괴변론자라고 평가 절하되는 소피스트들이 그들이다.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민주주의를 신봉했다.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합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에어컨 이야기를
소피스트들에게 적용하면 이렇다.
춥고 더움에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바로 춥고 더움이라 생각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춥고 더움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어컨 온도는
당연히 구성원들 전체의 합의에 의해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 기준’보다
‘사람들 사이의 합의’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서로 합의를 하려면 토론을 해야 하며,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설득돼야 한다.
혹은 서로 간에 약간씩 양보하여 절충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의 방법이 중요하다.
합리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중요시한 것이다.
괴변론자라고 평가절하되는 소피스트들은
사람들에게 합리적으로 토론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상대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를 통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지금으로 치면 논술교사인 셈이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소크라테스는 절대적 기준을 중요시했다.
법도 절대적 기준을 따라야 했다.
절대적 기준이 있으니, 고정 불변이어야 한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법을 추구했다.
소피스트들은 사람들 사이의 합의를 중요시했다.
민주주의를 중요시했다.
법도 사람들 사이에 합의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합의인 만큼
언제든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변할 수 있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들 사이의 합의는 변하기 마련이다.
합의에 의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법을 추구했다.
절대적인 법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한번 법은 영원한 법일 수밖에 없다.
한번 법이면 그것이 ‘악법’이더라도
‘법’이며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소피스트들에게는
영원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사람들 사이의 합의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변하기 마련이다.
소피스트들에게는 ‘악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
‘악법’은 사람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고쳐야하는
‘악’일 뿐이다.
* 이 글은 월간 <말> 8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의 세상 사는 지혜에서.. (0) | 2015.03.29 |
---|---|
몇 마디 잔 소리 (0) | 2015.03.29 |
"DASANI"브랜드... (영국판 김 선달 케이스) (0) | 2015.03.29 |
마른 우물과 굶주린 사자(톨스토이 우화) (0) | 2015.03.28 |
안디옥 교회의 바울과 바나바 선교사 파송 (0) | 2015.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