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의 세상 사는 지혜에서..

비타민님 2015. 3. 29. 07:19

상인인 부친이 빚을 지고 별세를 하는데,

유산을 상속하면 빚도 상속을 받게 되는 그 당시의 법으로

디오게네스 철학자는 과감하게 술통 속에 사는 거지의 길을 선택을 합니다.

철학이란 학문이 밥이나 빵을 굽는 기술이 아님을 잘 아실 것 입니다.

철학이란 만일 밥을 한다면 밤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다르는 학문입니다.

즉 논에 벼씨를 뿌려서 모내기 과정을 거쳐....밥이 상에 오르는 전반적이고

총괄적인 과정에 대해 다루는 학문 입니다.


디오게네스에게는

언젠가부터

''라는 별명이 붙어 따라다녔다.

누가 그 까닭을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게 뭔가를 주는 자에게는

꼬리를 치지만,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자에겐

짖어 대고,

못된 녀석에게는

물려고 덤벼들기 때문이지"

"그러면,

당신은 어떤 종류의 개인가요?"

"나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지만

그 사람들 어느 누구하고도 함께

사냥하러 따라가지 않는 개지"

 

디오게네스가 어느 날 아침

시장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소리쳤다.

"개다, 개야!"

그러자, 그는 아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개는 오히려 너희들이지.

사람 주위에 버텨 서서

사람이 밥 먹는 걸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야"

 

어느 연회석상이었다.

사람들이 마치 개에게 하듯이

디오게네스에게 고기 뼈다귀를 던져 주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자리를 뜨기 전에

개처럼 한 발을 들고 그들에게 오줌을 갈겨 주었다.


하루는 어느 심술궂은 젊은이가

디오게네스의 거처인 술통을 부숴 버렸다.

그러자,

시민들이 그에게 다른 술통을 하나 보내 주었으며,

그 못된 젊은이를 채찍으로 벌을 주었다.

오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던 디오게네스를

사람들은 진실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긴 글입니다.배경 음악을 끄고 읽으시면 좋습니다.

 

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빵 굽는 기술보다는 그 능력을,

다시 말하면 현상보다는 본질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철학이 존재 자체나 인간 이성 자체에서라기보다는

인간 삶의 한 연관성 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철학은 살아서 생동하는 현실이고,

현실을 가능케 하는 본래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현대 사회를 사람들은 정보화 사회라 하고,

이러한 사회를 지식 기반의 사회라고도 하지요.

지식 기반 내지 정보화 사회의 기틀은

먼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보 혁명에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 혁명은 기술에서 가능하였고,

기술은 과학에서 가능하였으며

그리고 과학은 수학적 논리성에서 가능하였습니다.

수학이 대상에 대한 형식적 관계를 논하는 학문이라면,

수학은 다만 논리적 관계를 규정하는 가상 학문,

다시 말하면 현실 사회에서

경험적으로 축적될 수 있는 현실 학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순수 사유의 초월적 원리에 바탕을 둔

선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학적 명제를

칸트는 ‘선험적 감성론’에서 순수 수학의 가능성으로 다루어

시간-공간의 순수 직관의 형식에다 설정한 반면에,

마르크스는 XY 선상에 있어서 시간은 1차원이고

공간은 3차원이라 하여

시간-공간의 수학적 명제를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사회 과학적 명제로 바꾸어 놓았지요.

이러한 수학적 명제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 가능토록 함으로써

인간은 마침내 첨단의 기술을 가지고

자연의 재해를 막을 수 있었는가 하면,

인간의 유전자 지도까지도 마련할 수 있어서

이제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답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점점 더 공허하게 되고

결국 허구에 빠지게 되는지.

더욱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명백백하게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가 하면,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기반을 상실하여

고향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지요!

고향 잃은 이 사람들이 이제 정보화 사회를 맞이하여

가상공간의 지식 기반 사회로

제정신 없이 급가속 페달만을 밟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멀티미디어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정보화 사회를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길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치주의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참다운 덕이나 행복은

개인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

즉 국가 속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이나 가족보다도 우위에 있는 것이요,

개인은 국가라는 전체의 한 우연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목적은

국민 개인의 유덕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 성원의 사생활과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논법에는 삼단논법(연역법)과 귀납법이 있다.

삼단논법이란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이

무엇인가가 전제로서 주어져 있고,

그 주어진 것과 다른 것이

이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요,

귀납법이란 '사람은 죽는다,

짐승도 죽는다, 식물도 죽는다'처럼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 통하게 하는 통로는 같다.

전자가 보편으로부터 특수 또는 개별을 끌어내는데 비해,

후자는 그 반대인 점이 다르다.

이 중 후자가 전자보다 보다 명료하게,

보다 감각적으로 일반 사람들을 승복시키는 힘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선' '관조의 덕'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달성하면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 목적은 사물이 지닌 기능을 잘 발휘할 때 달성된다.

식물은 식욕과 번식을 풍성히 하는데,

동물은 식욕과 감각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데서

행복한 상태에 이르는데 비해,

인간은 식욕과 감각이라는 정욕과

그리고 이성을 잘 조화시키는데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건전한 이성적 활동, 즉 덕에서 온다"

 

"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실천적 덕(윤리적 덕)과 이론적 덕(지적인 덕)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이성적 활동을 촉진하여

정욕을 억제하는 도덕적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순수한 이성 자체의 활동에 의한 것을 말한다.

전자는 후자로 가는 과정이다.

진리를 관조하는 덕에는 오는 행복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