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이민 사회에도 스스로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이
결국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23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1-12절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행하신 경계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13-36절까지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일곱 차례의 불행선언,
저주선언입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라는
구절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리고 끝으로
37-39절에
예루살렘을 향한 질책과 한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진정한 믿음생활을 하지 않고
그저 종교적 차원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깊이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아르헨티나의 이민교회가
어쩜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시기가 된 것인지 모릅니다.
이민
50년의 시간 속에
아르헨티나 한인교회의 역사도 함께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인 교회 안에서의 모습은 영혼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속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크고 작은 밀수,탈세,불법
고용,경찰 상납,이혼,퇴페업소
출입,등..
강대상에서는 복음 설교가 형식적인 시간 때우기 입니다..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뭔가 해결된 듯한 착각 속에서 삽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도 문제입니다.
타계하신 사랑하는 제 어머니 말씀이
“한인 촌의 떠돌이 개들과 너만이 직분이
집사 직분이 없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세움받았으면서도
그 합당한 믿음의 생활과 실천을 하지 못함이 보임니다.
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어야 할 성경을
제일 읽지 않는
장식용 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날마다 읽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말씀을 봐야 내가 뭘 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개울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연극 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교하였습니다.
위선자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명예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외양은 마치 미려한 양장본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들처럼,
내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외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쏟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듣기 좋은 말로 상대방을 속여서 안심시켜 놓은 다음,
기회를 엿보아 보복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악한 감정과 위선은 결국 드러나고 맙니다.
이들은 완벽하게 감정을 감추고 아무도 모르게 보복했다고 자축하더라도,
그 악의 썩은 냄새는 결코 감추어지지 못하고
만인 앞에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잠 26:26)
구약 시대나 신약시대나 외식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해치며
근본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의식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미워했으며 혈기의 노(怒)가
아니라
의분을 가지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러한 책망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책망하신 외식자의 모습(특징)은
어떠합니까?
1.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마6:2-5)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5)
2.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보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
5)
3. 겉과 속이 다르고 입술로만 섬깁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9막7:6)
4. 성경을 자기 과시의 도구로 생각합니다.(5절)
이단도 성경을 해석하며 사단도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성도를 유헉합니다(마4:6)
본문 속에서도
이와같이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은 성경을 자기 과시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을 자구적으로만 해석하여 그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이를 외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면
과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이 시대에도 반복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5.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합니다.(6절,
막12:39)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는데
상석이란 가장 편하고 높은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곳은 영광과 존귀의 상징인 자리였기 때문에
누구나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셨으며(눅14:11),
오히려 청함을 받았을 때 말석(末席)에
앉으므로써 청한 자로부터
상석으로 인도함을 받는 영광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눅14:10)
6. 기도를 길게 하고(눅20:47),
스스로를 의롭게 여깁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7. 존경받기를 좋아합니다(7절)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지도자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랍비는
'현명한 선생'
또는 "위대한
권위자" 라는 명예로운
칭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칭호를 듣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로써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양성경에서 랍비란 말은
세례 요한에게
1회,
예수님에게 12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고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랍비라 불리우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인간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8절)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우쭐하게 하는 호칭들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이러한 호칭은
오히려 스스로를 외식의 올무에 빠지게 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성도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겸손으로 옷입기를 요구하십니다.(벧전5:5)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교만과 외식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외식하는 자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을 듣기 때문입니다.
기도:
오!
마음이 온유하며 겸손하신 예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사,
제가
대접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높임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찬양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나를 구속해
주시옵소서.
날마다 저의 모습이 주님을 닮아나가는 새로운 삶을 주소서.
저의 신앙이 복음의 능력에 깊이 뿌리를 내려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수에 속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부족함이 전혀 없는
설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저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거짓과 속임수를 미워하게 하시며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지 않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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