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우물 안 개구리

비타민님 2015. 11. 5. 04:36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개구리를 일컫는 말이다.

장자(莊子) <後漢書>에보면 이러한 글이 있다.

“황하의 신이 강물을 따라 처음으로 북해에 동해를 바라보았다.

매우 넓음에 놀라서 북해의 신에게 물으니

‘우물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할 없는 것은

사는 곳에 구속된 까닭이며,

여름 벌레가 얼음을 말할 없는 것은 계절에 고정되어 이유이고,

정직하지 못한 선비는 도에 대해서 말할 없으니

세속적인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좁은 개울에서 나와 바다를 바라보고 나서

자기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젠 당신과 함께

천하의 진리를 말할 있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서 사는 때가 많이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산다는 말이다.

나의 시선이 절대로 옳다는 내주장만 있게 된다.

그래서 다른 식으로 세상을 바라다보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위치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기 때문이다.

넓은 세상에 어찌 하나의 절대적인 시선만이 존재할 있단 말인가.

 

어떤 때는 우물에 감금된 우리 자신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갇혀있는 순간과 우물을 알기를 원한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다.

만약 우물 개구리가

바다의 크기를 묘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대담하기를 원한다면,

개구리가 무슨 말을 것인가?

그것은 수백 개의 우물들을 모아놓은 비길 있다고 말할 것이다.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해시킬 있는 말이나 글은 없다.

오직 한길은 우물 밖으로 끌고 나와서 바다를 직접 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은 자신을 부인해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시각과 생각 그리고 식견을 깨야만 우물 밖으로 나갈 있다.

죽고 다시 체험을 하지 않고 어찌 육신의 생각을 벗어날 있겠는가?

굼벵이에서 매미가 나오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다.

벌레에게 어떻게 매미의 차원을 이해시키고 설명할 있는가.

껍질을 벗고 매미로 거듭나는 밖에 없다.

 

어느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다.

저녁때가 되자 메뚜기는,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

그러자 하루살이는 ",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하고 물었다.

내일이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다시 오늘같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내일 이라고 일러주었으나 하루살이는 이해할 리가 없었다.

메뚜기가 어느 개구리와 놀았다.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 그만 놀자,

날씨가 추워지니 내년에나 만나자" 라고 말했으나

내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고 다시 봄이 온다고 말했으나

메뚜기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루살이의 한계로는 내일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새날은 온다.

 

한번 따져볼 일들이다. 행여나 우물 개구리 삶은 아닌지,

오묘한 진리를 나의 작은 논리의 틀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

우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착각을 한다.

지금의 나를 박차고 나오는 것만이 우물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야 넓은 바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