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청교도들의 일곱 가지 감사 제목

비타민님 2016. 1. 8. 02:47

필자는 이민자로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42년 사는 개신교 평신도이다.

순례자로서 오늘 날 전해지는 청교도 이야기 이고,또 이들의 친척이

이민자로서 아르헨티나 남부에도 살고 있는데 출가한 딸이 사는 곳이다.

콜럼부스에 의해 북미대륙이 발견된 것은 1462년이었다.

그러나 백년이 훨씬 지나서야 영국인의 북미대륙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처음 이주해 영국인은 영국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607 버지니아 제임스타운(Jamestown) 정착하였다.

이들에 의해 이미 영국교회가 설립되기도 했으나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엘리자베스 여왕과 후임인 제임스 1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화란으로 망명 갔던 청교도들이

1620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는 장도에 올랐다.

이들을 가리켜 흔히 ‘순례자의 조상들’(the Pilgrim Fathers)이라고 부른다.

 

이젠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청교도들이

당시 영국국교회의 신학, 예배 의식, 그리고 교회의 체제 등에 반대하고

개혁을 주장했는데 영국교회 안에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1620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뉴잉글랜드, 북미 대륙으로 이주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1620 9 16

윌리암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7-1644) 장로의 지도아래

영국 남해안의 플리머스(Plymouth) 출발했는데,

남자는 78, 여자는 24, 인원은 102명이었다.

 

이들은 가족별로 각출한 돈으로

100 정도 되는 범선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고

배로 신대륙으로 향한 장정에 올랐다.

이들은 달간의 항해 끝에 1620 11 9

메서츄세쯔(Massachusetts)주의 케이프 카드(Cape Cod) 도착하였다.

이들은 신대륙을 영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불렀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의 여정을 출애굽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은 신앙의 자유를 누릴 있는 약속의 땅이었다.

비록 이들이 신대륙에 도착하였으나 새로운 삶의 환경에 대한 어려움과 병으로

다수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남자는 오직 27명만이 살아남았다.

그중 6명은 어린 아이었다.

1620 영국을 떠날 때의 항구였던 플리머스라고 명명한 지역으로 옮겨갔고

회중주의 원리에 따라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신 사건으로 보고

미국 대륙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 지방의 많은 지명들이 성경의 지명을 따랐다.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이들은

먼저 유능한 목자와 일꾼들을 기르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했는데,

하버드 대학(Harvard), 이든(Eden), 앤도버 뉴톤(Andover Newton),

그리고 예일 대학(Yale)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임을 천명하고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며

철저한 독립 교회를 이루어 갔다.

 

오직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 그리고 신앙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조국 강산을 떠났던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갖가지 고난이 그들을 엄습했으나

1621 새봄을 맞아 씨앗을 뿌리고 결실을 위해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가을이 되자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했으나 새로운 대륙에서 결실들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 익은 열매를 앞에 두고 인디언들을 초청한 가운데 감사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1620 '메이 풀라워호를 타고 미국 프리머스에 상륙 )

   , 180 밖에 되는 작은 배이지만 배라도 주심을 감사

   ,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게속 전진  있었음을 감사.

   , 항해 사람이 죽었으나 아기가 태어났음을 감사.

   , 폭풍으로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

다섯 , 여자들 명이 심한 파도 속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을 감사.

여섯 , 인디안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주셔서 감사.

일곱 ,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음을 감사.

 

ㅡ청교도 [淸敎徒, Puritan] 출처: 시사상식 사전

 

영국의 성공회(國敎會) 반대하여

순결한 신앙과 철저한 신교주의를 취한 청교도인은

인간은 누구나 검소, 근면을 생활신조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맡은 일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직업,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신명을 바쳐야 한다고 보고 있다.

 

청교도인의 교리는 성경 말씀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인격을 통합시키는 생활철학이며

성경이 모든 진리에 기초가 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특히 청교도는 성경을 중시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은 성경을 경외함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청교도는 영국에서의 종교 박해를 피해

1620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청교도인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

온갖 고난을 겪으며 미국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밀턴의 <실락원> 청교도 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다.

 

참고로 이후의 청교도들의 이주와 종교생활에 대해 첨언한다면,

뉴잉글랜드라고 말할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

메서추세츠, 햄프셔, 커네티커트, 로드 아일런드주의 지역을 말하는데,

플리머스가 있는 메서추세츠 식민지가 가장 먼저 개척되었다.

다음 1623년에는 햄프셔 식민지가, 1635년에는 코네티커트 식민지가,

1636년에는 로드아일랜드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지역의 식민지는 청교도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분리파 청교도, 교파적으로는 회중교회였으므로

회중교회 아닌 다른 교파는 배척을 당하거나 억압을 받았다.

 

순례자의 조상들의 뒤를 이어 1630 1천명의 청교도들을 인솔하여

뉴잉글랜드로 윈드로프(Winthrop, 1588-1649) 보스톤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는 메서추세츠주 초대 장관이었는데,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그는 장관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국민은 악한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주창했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으나

종교적으로는 회중교회만을 고집하였다.

그도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종교적 관용성이나 획일주의,

그리고 인디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c. 1603-1688)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청교도의 기원에서부터 이들의 북미 대륙으로의 이주,

그리고 추수감사절의 유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신앙운동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신앙과 기독자적 삶의 지평을 넓혀 주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