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선진국과 같이 시민혁명의 역사적 전통이 없이
조선 왕조 이후 일본이나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방이 되고,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역사적 경험에서 체득되지 못하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서구의 문물과 제도가 도입되다 보니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보임니다.
더구나 육이오 동란이란 동족 살상 참화을 거치며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냉전의 한 가운데에서 60년 이상을 지나오며
국민들에게 좌익 콤플렉스는 아직도 극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색깔론과 지방색 망령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철학적인 개념이 없는 정치인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무책임한 구태 의연한 정치가 개선되어야 할 것이고,
이념대립과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이익을 도모하려는 세력에 대하여
깨어있는 언론과 시민들이 합리적인 논리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 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남북관계 경색 국면은 부강하고 건실한 사회를 기반으로
글로벌 평화체제를 구축해서 기존의 말 뿐인 소모적인 이념 대립과
좌익콤플렉스가 북의 행포를 능가하는 정책으로 극복되어야만 가능할 것 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신학자이자 루터파 목사였던 마르틴 니멜러(Martin
Niemöller)는
최초에 나치에 대한 보수적 방관자였다고 합니다.
니묄러는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했다.
니묄러는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히틀러를 반대하는 독일 성직자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니묄러와는 달리 독일의 성직자들은 나치의 위협에 굴복했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니묄러를 매우 싫어하여 그를 체포했으며,
결국에는 작센하우젠과 다하우 강제 수용소 등에 감금했다.
니묄러는 연합군에 의해 1945년에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독일에서 성직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국민들을 참회와 화해를 이끄는 대변자로서 활동했다.
그의 시는 잘 알려져 있고 자주 인용되며,
흔히 특정의 조장된 두려움과 함께 시작되어,
이윽고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 집단적인 적의를 띰으로써 나타나는
정치적 무관심의 위험성을 묘사하는 데 인기가 있는 본보기이다.
나치의 행위는 세상을 지배하는 세태의 한가지 유형일 뿐이다.
나는 나치의 악행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을 떠나서
세상은 움직인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우리는 세태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움직이고 해는 여전히 뜬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현실을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 정치학에서 '부작위의 묵종' 이라고 부른다.
이 부작위의 묵종은 현실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너무나 무서운, 세태유지의 조력자이다.
필자가 사는 나라는 과거 20년 동안 세태유지의 조력자인
인기 용합 주위자들에 의해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이 되고 국가 재정은
파탄 일보에 이르게 된다.
총 인구가 4천만인 나라의
10%가 공무원이고 한국의 공무원이 인구 비율
4%인 것과는 비교가 되며
일하지 않고 국고를 탕진하는 자들이 이들의 태반이다.
이러한 퇴페적인 괴물들의 탄생은 정치,경제,사회 안정,예의와 도덕이란
기존 시스템을 파괴하는 평화의 적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어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는 그야말로 교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로베레 장군)이란 영화에서의 한 극중대사를 소개합니다.
국가가 어려운 때에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큰 죄악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가정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결코 잘한 일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나 않은지,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세상은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깨어지고, 이웃간의 신뢰도 깨어지고 교회도 갈라지고...
깨어지고 갈라지고 등돌리는 사랑...무엇이 문제일까?
말과 입술만 고백하는 그 사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수없이 입으로 되뇌이는 '사랑한다.'는 말, 가슴과 지식 속에 감추어진 사랑,
그것은 입술의 유희, 감정의 유희일 뿐, 진실한 사랑은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랑만이 숭고한 사랑, 진실한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행동하는 사랑, 숭고하고 온전하며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은 행동하는 사랑만이 온전한 사랑임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닮아가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세상민심은 극도로 혼란스러워가고 있다고 모두들 개탄합니다.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탄식 소리가 드높습니다.
그렇다면, 저렇게 수많은 사람의 영혼이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과연 이 자리에 이대로 머물러 안주하여도 좋은가?
현대 기독교가 병들었다고 수군대는 말에 합류하기 잘하지만,
그 병든 기독교를 위해서 나는 아무것도 하려는 생각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잘못이 있는 것을 큰 소리로 지적은 잘하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대로
영원히 존속하도록 방치하시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긴박한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나는, 과연,
주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죄도 없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날에 과연 우리 주님께서도 그런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인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칭찬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악하고 게으런 종아, 너는 내가 심지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5:14-30절
)
주인의 냉혹하고도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나는 내 가정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내 주님의 교회가 새로워지고
변화를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영혼을 위해 지금 어떤 헌신을 하고 있는가?
생각과 머리, 그리고 입술 외에는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가슴을 열고 드려다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끼며,
심히 부끄러운 생각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이 아침의 고백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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