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 나무 (mustard seed)
출처:http://www.haeunchurch.com/board_ljxq48/29658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은 13장에는 겨자씨를 모든 다른 씨보다 작은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주 작은 겨자씨를 가지고 있는 식물을 “나무”로 설명하였지만, 사실은 1.8 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지만 최고 3 m까지
자라며 노란 색의 꽃을 가지고 있는 일년생짜리 풀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는 겨자(히브리어; 하르달) 나무(풀)는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에서 새가 깃들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는 (누가복음 13:19)의 천국 비유의 말씀 때문에 우리들은
겨자 나무가 커다란 나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연노랑색의 작은 꽃을 가지고 있는 1년생 풀입니다.
이 겨자 풀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잘 자라지만 특히 갈릴리 지방에서 많이 자라며, 2~3월에 이 지방으로 여행하게 되면
마치 유채꽃과 흡사하게 생긴 노란 색의 겨자 풀꽃이 온 산과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언덕 길가에 흔하게 피어 있는 겨자 풀과 꽃
겨자씨는 크게 분류하자면 "검은 겨자(Brassica nigra)"와 "흰 겨자(Sinapis alba)" 두 종류가 있습니다.
두 가지의 겨자 풀 모두 그 키가 비슷한데다 똑같이 노란 꽃이 피므로 구분하기 힘들지만, 잔털과 씨방의 모양을 보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검은 겨자는 식물이 매끈하여 잔털이 없고, 씨앗은 한 꼬투리 안에 5~10개가 들어 있어서 흰 겨자 씨앗보다 그 크기가
더 작습니다. 이에 비해 흰 겨자 풀은 몸(줄기)에 잔털이 나 있고, 씨앗은
끝이 뾰족한 작은 꼬투리(seed-pods)에 2~3개 정도 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검은 겨자씨를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면서 소개하였던 작은 겨자씨로 지목하고 있으나,
실제 갈릴리에서 자라는 것은 대부분 흰 겨자씨를 가진 겨자 풀들입니다.
참고로 예루살렘 부근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무덤에 가면 아랍 상인이 한국말로 “겨자씨! 겨자씨!” 하면서 겨자씨라는 것을 팔고
있는데 이렇게 겨자씨로 팔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야생담배씨를 팔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의 성직자들도 그걸 겨자씨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정원무덤의 영국인들도 야생담배씨를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마한 봉지에 코팅하여 겨자씨로 판매하고 있을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 것입니다.
먼지같이 생긴 야생 담배 씨앗(왼쪽)과 직경 약 2 mm 정도의 검은 겨자 씨앗(오른 쪽)
이스라엘에는 야생 담배나무가 많으며, 이 야생 담배 나무의 씨앗은 먼지처럼 아주 작은 씨앗을 아주 많이 맺습니다.
이 야생 담배 나무는 불과 200년 전에 미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옮겨 들어와서 자생하게 된 식물입니다.
야생 담배나무는, 어릴 때는 재배하는 담배 풀처럼 자라다가 점차 줄기가 2~3 m로 자라 나무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 나무는 지중해 연안의 기후풍토와 잘 맞아서 마치 토착 식물처럼 잘 자라서 널리 분포되어 있는 나무입니다.
봄에 무성하게 나던 잎은 점차 작은 잎으로 바뀌고, 5~10월에는 노랗고 긴 꽃이 핍니다.
꽃은 길이 4~5 cm, 넓이 0.8 cm 정도이고 씨방 안에는 먼지처럼 작은 씨앗이 소복하게 들어 있습니다.
이 나무의 씨앗을 겨자씨로 팔고 있는 것입니다.
흰 겨자(Sinapis
alba) 씨와 검은 겨자(Brassica nigra) 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실 때, 비유법을 많이 사용하시면서 설명하여 주셨는데, 겨자씨를 통한 천국비유가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방에서 흔하게 자라고 있는 겨자 풀을 보게 된다면 새들이
깃들 정도로 커다란 나무로 알고 있었던 것이
낮은 잡초와 같은 풀이라는 것을 보고 실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물음을
갖게 됩니다.
결코 새가 깃들 수 없는, 기껏해야 1.8 m까지 밖에 자라지 않는 풀이 겨자나무라면 다음 둘 중에 하나가 맞을 것입니다.
저 겨자 풀이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었던 그 겨자나무가 아니든지....?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든지……?
이 질문에 대하여 이스라엘 현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류 모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답은 후자, 즉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지 이스라엘에 와서 겨자나무를 보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질문이지만,
겨자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겨자나무가 새가 깃들 수 있을 만큼 자라는 커다란 나무로 생각합니다.
마치 매일 쌀로 지은 밥을 먹지만 농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도시의 아이들이
쌀을 “쌀 나무”에 맺히는 열매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의 초점은 겨자나무가 길거리에 널려 있는 대표적인 “잡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에 나오는 이 사람은 잡초에 불과한 겨자 풀의 씨를 자기 채전(정원)에 가져다가 심었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화초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자라는 잡초를 뽑아주는
일입니다. 정원에 “심은 적이 없는” 잡초는 “수시로 뽑아주어야 하는”
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대표적인 잡초에 불과한 겨자 풀의 씨앗을 자신의 정원에 갖다 심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은 비유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비유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비유에는 당시 랍비들이 즐겨 쓰는 과장법도 함께 들어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잡초 풀에 불과한 겨자의 씨앗을 정원에 가져다 심고 잘 가꾸어서 마침내 새가 깃들 정도의 큰 나무로
자라게 한다는 것이
겨자씨를 통한 예수님의 천국 비유의 초점인 것입니다.
잡초인 겨자 풀의 씨앗을 아무리 잘 가꾼다고 해도 결코 새가 깃들 만큼의 커다란 나무로 자라지 않는다는데
“과장법 표현”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AD 1세기 당시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그리고 현실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예로 드는 과장법을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랍비”로 인정하여 주었던 만큼, 예수님도 당시의 랍비들이 즐겨 사용하던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여 예화로 설명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과장법인데,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5:29)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종한다면 천국에는 분명하게 애꾸눈, 외팔이, 절뚝발이들로 가득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당시 랍비들이 즐겨 사용하던 과장법의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도 이렇게 당시의 랍비들이 즐겨 사용하던 과장법으로 설명하여 주신 이야기입니다.
겨자씨는 잡초의 씨앗이고 잡초는 정원에서 수시로 뽑아주어야 하는데, 정원에 갖다가 심었다?
그리고 이것을 잘 가꾸어 주면 새들이 와서 깃들 정도로 아주 커다란 나무가 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역설이요 과장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시던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은 매해 2~3월이 되면 갈릴리 호수 주변을 노랗게 물들일
정도로
잡초처럼 피는 겨자 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잡초의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어서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 주민들은 유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 사회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갈릴리의
이방인”으로 멸시받으면서 “잡초”처럼 눌려 있었던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잡초의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어서 큰 나무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은혜의 말씀을 듣고 말로는 설명 못할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들은 잡초와 같은 신분에서 결국에는
수많은 새들이 깃드는 인류의 “커다란 나무들”로
자라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3년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잡초처럼 버려진 인생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처럼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저는 류 선교사님의 설교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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