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소설인 초한지를 보면
농사를 지으면 10배의 수확을 얻고,장사를 하면 100배.
정치를 하면 수 없는 재화를 얻는다는 말이 기억이 난다.
뉴스를 보면 온통 정치인의 부정과 부패가 화제가 된다.
필자가 사는 나라도 전 정권의 부정 부패가 화제가 되고 있고
현 대통령은 소신과 원칙을 강조하지만 관용과도 타협을 해야 한다는
정치 제스쳐의 리더쉽 모습으로 빈민층 보조금 정책?도 보고 있다.
일은 안하고 놀고 먹는 자들을 먹여살리는 보조금이라는 뜻이다.
1950년대에 제2 통화 강국이던 아르헨티나 경제를 빚쟁이 국가로 만들고
60년 이상 나라를 말아 먹은 자들의 눈치를 보는 민주주의?정치이기도 하다.
긴 글이지만 모신 글이니 인내를 가지시고 읽기를 바람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황희에 관한 기록은
일반인들에게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진 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많이 실려있다.
황희는 너그러운 성품 탓에 주위의 청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해
매관매직 혐의로 수차례 탄핵을 받았다.
또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해
맹사성까지 끌어들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고,
심지어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다가
사헌부의 조사로 들통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황희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상소를 무시하거나,
황희를 파직하는 흉내만 냈다가 1년도 안되어 다시 정승으로 기용하는 등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황희의 뛰어난 정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허물을 눈감아 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희의 허물은 본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황희에게는 황치신, 황수신, 황보신이라는 세 명의 적자와
황중생이라는 서얼 자식이 있었다.
그 중 황중생은 황희가 조선시대 2품 이상 고위관료들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관청인 내섬시(內贍寺) 소속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자식이었는데, 황희의 도움으로
동궁(東宮)의 소친시(小親寺)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서얼이란?
서자(庶子)와 얼자(孼子)를 합쳐 부르는 말로,
서자는 첩의 신분이 평민인 경우,
얼자는 첩의 신분이 천민인 경우를 말한다.
황중생은 관청 소속의 천민인 여종의 자식이므로 서자가 아닌 얼자이다.
문제는 황중생이 궁으로 들어오고 얼마 뒤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궁궐 내 절도 사건이었다.
대대적인 수색에도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던 이 사건의 범인이
바로 황중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서얼 출신이지만 황희 정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용의선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세종 18년에 또다시 궁궐 내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
임금의 재산을 보관하는 내탕고의 물건이 도난 당한 큰 사건이었는데,
이번에도 범인은 또 황중생이었다.
훔친 물건이 일반인이 소장하거나
팔아 넘길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덜미를 잡히고 자백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자백에 또 다른 이름이 거론되었다.
장물과 관련하여 그의 이복 형인 황보신(黃保身)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황중생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황보신의 경우 본처 소생의 적자였기 때문에
가문에 큰 누를 끼치는 일이었다.
늘 황희를 감싸주었던 세종은 차마 이 일까지 덮을 수 없어
황보신에게 처벌을 내리고자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황희의 아들인 장남 황치신(黃致身)이 엮이게 된다.
원래 황보신이 받은 처벌의 내용 중에는
녹봉으로 주어졌던 과전(科田)을 몰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당시 호조참판(지금의 재경부 차관)으로 재직중이던 황보신의 맏형,
황치신은 몰수 대상인 비옥한 황보신의 과전을 차지하고,
그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척박한 땅을 대신 벌금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어떻게 황희가 청백리라고 소문이 났을까요?
사실 《황희의 청백리 신화》를 만든 것은 황희 개인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이었다.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왕조가 출범한 중국 대륙의 명나라에서는
기존의 ‘재상제’를 폐지하고 ‘황제독재체제’로 정부조직을 변화시켰다.
대대로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상제 폐지가 충격이었다.
만일 조선이 명나라의 체제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곧 양반 집단의 기득권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 관료집단은 재상제를 사수하기 위해 기득권 안에서
상대적으로 청렴하면서도
또한 자기 세력이 별로 없어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을
대외 홍보용 재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 황희였다.
황희 입장에서는 양반 관료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며
동시에 자신도 재상직을 오래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런 이유로 황희는 사후에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양반 계측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되는 ‘청백리 신화’ 속에 싸이고,
그 과정에서 과거 그의 부패와 물의가 가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황희는 실제로 전혀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비록 황희가 개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황희는 도덕군자가 아닌 현실 정치인이었으며,
누가 뭐래도 조선조 최장수 임명직 재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태종과 세종시대를 거치면서
세자가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바뀌는 등의 정치적인 격랑 속에서도
무려 20여 년을 재상직에 머물렀고,
세종 연간의 태평세월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는 조선왕조를 통털어 전무후무하며,
독재가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황희는 정치 일선에서 강직한 성품으로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베풀어 조선 왕조의 조기안정화에 기여했다.
현실 정치란 결코 원칙과 소신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는 반대파를 적절히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황희는 그런 강약 조절을 매우 잘 한 인물이었다.
또한 황희에게는 맹사성이라는 훌륭한 정치적 파트너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지녔는데,
황희가 학자적인 인물로서 분명하고 강직함을 추구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정치 일선에서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성품과 기질을 바탕으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정확성과 과단성이 필요한 관서에서 인사, 행정, 군사의 업무를 맡고,
맹사성은 주로 예조나 공조 등 유연성이 요구되는 업무를 맡으며
정치적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청백리 맹사성
황희 못지 않게 청백리로 유명했던 맹사성은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시종 없이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좌의정이던 맹사성이
고향인 충남 온양에 어른들을 뵈러 들를 때의 일이다.
소식을 접한 안성 현감과 진위 현감은 이참에 좌의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가 지나갈 길을 잘 닦아 놓고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좌의정 일행은 전혀 보이지 않고,
해질 무렵 한 노인이 혼자서 소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현감 일행 중 한 하인이 나서서
“좌의정이 지나갈 길에 웬 무지렁이 노인네가 지나가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만들어 놓은 길을 못 갈 이유가 뭐냐고 되물었다.
결국 하인은 노인을 소에서 끌어내려 현감 앞에 내동댕이 쳤는데,
현감들이 “웬 정신 나간 노인네냐”고 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라고 한 순간 깜짝 놀라 모두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 노인네가 바로 맹사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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