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다시 읽는 한국 시- 그 날 (이성복 李晟馥)

비타민님 2016. 8. 18. 16:20



  

아버지는 일곱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후에 창녀가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 다정함을

건의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었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1980) 

 

이성복(李晟馥)

 

1952 경상북도 상주 출생

1982 서울대학교 불문과 대학원 졸업       

1977 ?문학과 지성? <정든 유곽(遊廓)>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82 2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0 4 소월시 문학상 수상

 

시집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남해 금산?(1987),

? 여름의 ?(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2)

 

이성복은 평상인들을 뛰어넘는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자유 연상의 기법으로 등단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있는 시인이다.

현실과 직결되며 현재의 불행을 구성하는 온갖 누추한 기억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상은 초현실주의 시를 방불하게 하는

현란한 이미지를 빚어낸다.

이처럼 현실과 밀착된 기억에서부터 창출해내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바로 왜곡된 현실을 고발하는 시적 방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보편적이고 공적인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확대시킬 있다.

삶의 범주 차원에서 그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모든 사물은 상관적으로 존재할 아니라,

유일한 핵심은 없다는 점이다.

 

시는 연상의 원리를 특징으로 하는 이성복의 초기시 대표작이다.

시적 화자의 연상에 의해 그려지는 일상의 소묘는

무감각하게 마비된 병든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에서 가족이란 삶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시에서 보는 것처럼 초기시에서는

주로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의 초상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인 아버지의 움직임에서 출발한 연상 작용은

여동생과 어머니에 이어, ‘나’에까지 이른다.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비해

무기력하게 소일하는 화자 자신의 자괴감을 엿볼 있다.

젊은 그가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행동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비추어 전방의 무사함을 연상시킬 아니라,

불안한 휴전 상태가 삶의 조건이 되어 있는 현실은

전방이 무사하기만 하면 세상은 완벽하다는 아이러니를 유발시킨다.

 

이러한 연상의 고리는 통치의 미비함을 무마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시 상황을 강조하던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은밀한 비판을 이루기도 한다.

 

완벽한 세상이라면 없는 것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나타나는 창녀들에 대한 연상을 통해

화자는, 현실이 없어야 것조차 있는 부조리의 세상임을 강조한다.

게다가 더욱 섬뜩하게 이어지는

‘몇 후에 창녀가 애들’의 연상은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으로까지 연결되는

강한 현실 부정에서 비롯된다.

집일을 돕는 애들의 연상은

가장인 아버지의 피로한 일상으로 다시금 이어지고,

여동생의 데이트에 대한 상상에 이어

‘멋진 여자’를 기억으로 닿는다.

자신의 풀리지 않는 사랑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끝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과격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완벽한 세상’에서 태평스럽게 노닥거리는,

그러나 전혀 편하지 않은 ‘나’의 현실은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들이

모두 새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며,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 삶까지 솎아내는 것’과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 무너뜨리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는

곤고한 사람들의 삶에 닿는다.

 

그러다가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 다정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교통 사고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는 사건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만 ,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한다며 씁쓸해 한다.

 

결국 화자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시상을 마무리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궁핍과 퇴폐의 현실적 속에 살아가는 존재일 아니라,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곳인지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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