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만차의 돈 키호테(Don Quijote de La Mancha는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지은 소설로,
세계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된다.
제목은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1605년 《라 만차의 비범한 이달고 돈 키호테》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발표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어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는
길가에서 책을 들고 울고 웃는 사람을 보고
“저 자는 미친 게 아니라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게 틀림없다.”라고
말한 일화가 전해진다.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속편은 1615년
《속편: 라 만차의 비범한 기사 돈 키호테》
(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b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스페인 황금기의 대표적인 문학일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품으로 꼽힌다.(위키백과)
주인공인 돈 키호테는 책을 많이 읽어 잘난척을 잘한다.
사색을 많이 한 끝에 이 세상의 문제가 기사도의 결여에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직접 방랑기사로 나서 원정을 나간다.
풍차를 “모닝스타를 든 거인”으로 오해하여 공격하기도 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다. 본명은 알론소 키하노이다.
현금 필자가 사는 나라의 정치 경제를 일견하면
세르반테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국민을 불경기로 웃기고 있다.
현 대통령 마크리를 보면 이달고(신사) 돈 키호테를 보는 느낌이다.
그는 금수저 출신으로 태어난 이달고이고,엔지니어 출신인 재벌이다.
21세기에 생산에서 유통과정을 통한 소비의 패턴을 금수저 출신이 모르겠는가?
고질병인 생산성 향상,과세의 부담,노동의 질적 향상,암적 존재인 노동조합,교육,투자,부정과 부패..등..
이러한 전반적인 국가의 암적 존재들을 건성으로 취급하는 앵무새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문학자인 ‘빅토르 위고’는
인간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세가지 싸움을하다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였는데,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
그리고 자신과 자신과의 싸움으로 나누었다.
자연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놀라운 지능을 이용해
위대한 문명들을 만들어 갈수는 있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자연을 넘을 수는 없다고 했고,
인간과의 싸움에서는 어리석게도 경쟁이란 틀에 갇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 살다가
이런 경쟁이 결국 국가와 국가간의 경쟁으로 발전해
전쟁이란 비극을 만들어 인간 스스로가 파멸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인간의 내면 속에는 선과 악이 늘 공존해 어느 것이 이기느냐에 따라
인간의 가치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는데,
위고는 <레 미제라블>이란 불멸의 작품을 통해
선한 자아가 악한 자아를 물리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서도,
그리고 인간과의 싸움에서도 패배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내면에 남아있는 양심이란 선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면
그 인생은 변화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어느 한순간 죽음이 찾아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을 가슴 속에 품게된다.
사실 주위에서 지인의 죽음을 나에 대한 슬픔이리라.
부모,친구,지인의 죽음은
결국 나 또한 언제든지 죽음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고
나의 삶 자체가 예고없이 한순간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기에
그때부터 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며 삶의 이유는 무엇이고
인간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내적 저항과 삶에 대한 환멸..
그리고 다시금 죽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기나긴 인생 여행의 시작점 일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그리 깊게 하지 않는다.
그네들의 삶은 대게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거나 못 한다거나 하는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여러 대상들에 대해서 그저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좋아한다.
이를테면 다양한 사물이나 대상들..
심지어는 땅과 사람, 짐승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것까지도.
나의 것, 나의 소유라는 것으로 말하며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단지 나 혼자만의 것으로 정의내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들은 많은 것들에 대해서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점차 더 많아질 수록
자신은 더더욱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낮고 저급한, 소위 말하는 사적 권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것들은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숭고한 삶의 경험이 아니라
단지 많은 것을 나의 것이라 단정짓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 것과 같아서,
아이들이 놀이가 끝나고 집에가면 그 놀이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마냥
우리도 언젠가 죽음을 마주하게되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목숨걸었던 사적 권리들이
결국엔 보잘겂없는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본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하자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사랑할 줄 모르고 살아갈 능력조차 없어보인다.
그들이 하는 행위란 그저 하루 하루 삶을 연명해가며
삶의 만족을 위한 인생이 아닌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채우기 위한, 허영을 위한 것들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재산을 불릴 수 있는가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의 논리에 타협하고 영합하며
돈이라는 한가지 통로만을 열심히 쫓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으로 바라본다.
특별한 재주가 있지도 않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 출구없는 통로를 끝없이 달리며
앞날이 뻔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은 기껏 잘되봐야 조금 더 잘 사는 서민이 될 뿐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고있는가라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흥에 겨워 행복한 얼굴로 떠들어대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에그들은 어째서
마냥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일까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나는 왜 저들처럼 단순해지고 행복해질 순 없는 걸까 하는
불만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행복스런 편한 골프채와 술잔을 든 돼지로 살 바엔
소크라테스 처럼 초연하게 사는 것이 나으리라 자위하며 돌아선다.
어쨌든.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안정되고, 평화롭고 편하게 잘 사는것?
당신이 평생을 한 곳에 안주하며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편하게 산다고한다면
말년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되짚어 볼 때 무엇이 생각나겠는가?
당시에 기쁨이라 느꼈던 것 모든 것들이
이제 우리의 눈앞에서 녹아내려 부질없는 것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만 행복을 찾을 때,
행복이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을 포기한 채 삶을 살아왔을 때
그러한 삶은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쁨들은 더욱 부질없고 의혹투성이의 것으로 바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좋았던 것은 점차 줄어만 갈 것이고
우리 삶은 지루한 나날들의 연속으로 계속될 것이다.
생명 없는 직무와 돈에 대한 걱정들로 한 해가 지나가고
그 다음 해가 지나가며 그렇게 10년, 20년 항상 똑같았던 삶을 반복하면서
인생은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으로 전락하고만다.
이러한 삶은 사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산을 오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란 것이 내 발 아래에서 점차 멀어져만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미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인생이라는게
그렇게 덧없고 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추구하는 것은
죄다 거짓이고 사기에 불과하다.
이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삶과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날마다 반성하면서 살겠다”라는 말은 “남을 배려하며 살기보단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적이 많았다”는 것으로 위고의 비유에서 보면
‘인간과의 싸움’을 표현한 말처럼 들리고, “용기 있게 살겠다”는 말은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비굴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악이 승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죽은 후에 무엇인가 남는 삶을 살겠다”는 표현은
죽음이라는 자연은 거스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임을 깨닫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으로
‘자연과의 싸움’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을 향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에 대한
참으로 진솔한 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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