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종교인과 신앙인

비타민님 2017. 6. 11. 17:13

낭송-인생의 부귀와 영화(금수저와 흙수저)

힌국엔 " 실",아르헨티나엔  "나사로 바에스"가 있습니다.

사람은 부동산 소유의 권위자 입니다..

나사로 바에스가 소유한 땅 면적은 우리 나라의 두배나 되는 면적으로

최근 8년간에 사들인 겁니다..

사람의 공통점은 형사범 혐의로 형무소가 현주소 입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예배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롯 유다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정말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가

좋은 환경과 기회가 누구보다 많았던 사람입니다. 유다지파입니다.

가장 축복받은 지파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유다지파입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무리들과 군중들이 예수를 쫓아 다닙니다.

예수님의 얼굴만 봐도 영광이고 예수님께서 마디 말을 걸어주시면

그것은 생애 가장 위대한 축복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예수님과 함께 3년을 같이 다닙니다.

그것도 재정을 맡은 자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제자가 좋은 기회 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디에서도 유다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디에도 예수님이 전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장소 사건에서 악한 역으로 나옵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기 도덕심 자기의 윤리 자기 만족감...

 

가롯 유다의 결정적인 비극은 예수를 팔아버린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

예수님께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 자매분!

여기 가룟 유다의 행보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시지는 않습니까?

사실 성경을 묵상하다가 유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유들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날 있는 이유들입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 다른 사람을 배신하지는 않습니까?

나를 아끼는 사람을 배신하지는 않습니까?

심지어는 나라의 재정을 횡령 착복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믿지는 않습니까?

나의 자식의 출세를 우리해서 기도하고 내병을 고치기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유다의 출발과 같지 않습니까?

 

유다의 모습에서 철저하게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26 21

"너희 중에 나를 자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자는 비롯 가롯 유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아닙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해석할 적용의 대상은 자신이어야 합니다

유다는 과거 2천년 과거의 인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화가입니다.

렘브란트는 성경를 주제로 하는 성화들을 그릴 때는 

흔히 성화에서 있는 화려하고 거룩한 느낌 대신에 인물들의 심리를 담아내는

심리묘사가 그의 특징이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성경의 여러 사건들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욕망들을 들추어내곤 하였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성경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탕자의 모습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으라고 고함치는 

유대인 패거리들의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속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그는 그림 속에서 외칩니다. “주여, 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언제나 돌아온 탕자의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박으라고 외치는 무지하고 뻔뻔했던 군중속의 사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은 보지 못하고 남에게 돌을 던지는 살인자의 모습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엎디어 울부짖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가룟 유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칫 물질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려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친구와 부모를 배신합니다. 가족을 배신합니다. 나라를 배신합니다

 

너희중에 누군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에 내가 포함될수 있습니다.

나도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롯유다가 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작 중에 하나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있었던 야사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과연 예수님의 얼굴을 누구로 하며 

배신자 유다의 얼굴을 누구로 할지 모델을 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 어느 시골의 예배당에 갔는데

거기에 찬양대에서 청년이 찬양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얼굴에 평화 얼굴에 기쁨 가득찬양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바로 모습이다.

마지막 유다는 누구를 것인가...

다시 마을에 저녁 어느 거리를 지나다가 

술에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청년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청년은

바로 달전 자기가 보았던 찬양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유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수도 있고 배신자 유다의 얼굴이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