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정치를
바보들의
다수결에
해당하는
중우정치로
규정하고
전
생애에
걸쳐서
이에
반대했다.
특히
재판이
있었던
시기의
아테네의
사회적
분위기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위기를
맞이했다.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것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는
30인
참주정이
세워지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리기
2년
전,
30인
참주
독재의
끔찍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테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는
이
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반역의
주역들이
대부분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를
배신했던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의
지도자였고
쿠데타의
주범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유한
귀족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이는
다분히
소크라테스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다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따르는
민주주의보다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탁월한
통치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더
완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테네의
시민들
입장에서는
청년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판단이
근저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재판은
제비뽑기로
추첨된
배심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재판에
501명의
시민
재판관이
참여했는데,
이
정도의
숫자면
당시
얼마
되지
않았던
아테네
시민의
숫자와
비교해볼
때
시민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501명의
시민
재판관들은
280
대
221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형량에
관한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인
360
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던
소크라테스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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