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코람데오)♠
촌노는 기독교인으로서 내 자신의 신앙관을 돌아 봅니다.
개신교 기독교 신앙은 개신교인 각자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지에 관한 종교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죄값은 지불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께 순종하며 은혜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독교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좀더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좀더 진지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좀더 진지하게 성경에 대해서 상고하기를 원하신다면....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적인 활동보다는 나와 주 예수님.. ‘관계’에 관한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의 목표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에 얽매이는 대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및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이런 신앙의 핵심 외에도 기독교는 무엇이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지를 보여주는 다른 많은 항목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
곧 “하나님의 입김이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가르침은 신앙과 실천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해 최종 권위를 가진다고 믿습니다
(딤후 3:16; 벧후 1:20-21).
기독교인은 세 위격(품격),
즉 성부와 성자(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 이해를 하지를 못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참회록>을 또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고,
믿음과 신앙의 견해 차이로 부부 간에 화해할 수 없는 틈이 벌어지는
가정사는 내 마음의 고민을 더하기도 한 적이 많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백작의 일생은 나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있다.
톨스토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많은 것을 얻었고 누렸다.
츨신이 백작 가문이고 독실한 동방 정교회 신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원만했고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진리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버렸다.
진리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전의 행복은 고통의 원인이 되었고,
이전의 자랑은 수치가 되었다. 부부 간의 사랑에 금이 갔고,
가정의 평화가 흔들렸다.
마음으로 꿈꾸는 진리의 삶과 진리에 어긋나는 자신의 처지를 번민하면서
날마다 가출을 꿈꾸는 잔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또한 그는 추앙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82세라고 하는 노구의 몸을 끌고 가출을 했다.
그것도 추운 러시아의 한 겨울 야밤에 아내가 잠든 틈을 이용해,
아내에게 들킬까 봐 극도로 불안해하면서
헌외투를 입고 몰래 집을 빠져나가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3일 만에 병이 들어
아스타포보라는 조그만 시골의 간이역에서 멈추고 말았다.
다행히 역장의 배려로 역장의 집에서 일주일을 묵으며 간호했지만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가출한 지 열흘 만에 덧없는 인생 여정을 마친다.
아내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특별 열차까지 세내어 간이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끝내 아내와 만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모든 상황의 궁극적인 책임은 톨스토이를 깨운 진리가
십자가의 예수 보혈에 기초한 신앙인지,
아니면 말씀 신앙과 진리에 대한 헌신인지에 대해서는
나의 판단으로는 알 수가 없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해석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단순하고 평범하며, 이해하기 쉽고,
의혹이 없는 가르침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적용되는지를 이해했다.
그의 신앙 고백 중 일부다.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의 소박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말한 것을 이해하거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지금 한국의 개신교나 이민 교회 일부에서도 행해지는 의식에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 말이 주님 앞에 열납되게 행하는가?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한다.
그는 교회당 안에서 기도하기보다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를 올리기를 바랐다.
예수는 또한 교회당(성전?) 자체, 그러한 제단과 의상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이 왔다고 말씀하시며,
기도는 제단이 아닌
마음과 진실 속에서 스스로 해야 한다고 복음을 전했다.
더욱이 공동체에 참석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이 의식이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행함이 없다면,
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고 조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배 의식 중에 사제가 사람들 앞에 들고 나와 입맞춤하게 한
끝에 칠보 메달이 달리 금십자가 만 해도
그리스도가 지금 그와 같은 일이 행해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못 박혀 죽게 된 형구(刑具)를 본뜬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여기는 사제들은
실상은 그리스도가 아닌
신자들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라는 데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와 같이 생각한 ‘불쌍한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펼친 복음을 감추어
그들에게서 최대의 행복을 빼앗고
더욱 참혹한 괴로움 속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사제는 오늘 행한 모든 일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이것만이 그의 유일하고 진실된 신앙이며
옛날의 성인들도 이를 믿어왔고
지금의 종교나 정치 관계의 관리자들도 이를 행하고 있다고
교육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부활',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민음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