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존재 유무에 대한 내기를 한다면…
항상 “<신이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어라.
내기에서 이겼을 때 얻는 것이 무한한 행복이고,
졌을 때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
이런 내기에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내던져라.”
파스칼-팡세-
즉 파스칼은
“어차피 신이 있는지 없는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거라면,
<신이 있다>고 믿어서 손해볼 게 뭐냐”는 것이다.
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실제로 신이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으니 손해볼 게 없다.
그리고 신이 없다 해도 손해볼 일은 없다.
신이 있다고 믿은 사람이라면 신의 말씀에 따르는
성경 말씀대로 충실한 삶을 살아왔을 가능성이 높고,
그 충실한 삶은 곧 그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이 없다고 믿었는데
신이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천국에도 못 가거니와,
영생을 구하지도 않으니,
신의 말씀에 거스르는 방종한 삶을 살아왔을 확률이 높다.
방종한 삶을 산 대가는 언제든 바로 자기 자신이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있다고 믿으면 손해볼 게 아무것도 없지만,
없다고 믿을 경우엔 손해가 막심하다면,
어느 쪽에 내기를 걸어야 할지는 철부지도 잘 알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
두노인을
통해서
삶을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다
늙은
나이에
삶에서
진정
중요한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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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두 노인 중 한 분은 술담배도 하지 않고
태어나서 나쁜 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엄격하고
야무진 예핌이라는 부자노인이고,
또 한 분은 술도 좋아하고, 늘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고
벼르면서도 코담배를 끊지 못하는
유쾌하고 착한 성품의 예리세이라는 노인이다.
두 노인은 진작부터 순례를 떠나려고 계획하고 있었지만
부자노인 예핌 노인이
공사를 마무리짓느라 바빠서 차일피일 미뤄왔던 거였다.
그런 예핌 노인을 보고 예리세이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네.
그 어느 것보다 영혼의 일이 먼저 질서가 잡혀야 편치 않겠나?”
두 노인은 여행경비로 100루블씩을 마련했다.
부자인 예핌 노인이야 돈을 마련하느라 힘들 게 없었지만,
예리세이 노인은 아내와 자식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마련한 돈이었다.
드디어 성지순례를 떠나고 5주일이 지난 어느 더운 날 오후,
예리세이 노인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한 농가로 갔다가
그곳에서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일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바싹 여읜 남편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지경으로
해가 쨍쨍 내리쬐는 담장 아래 누워 있었고,
아내는 페치카 옆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빵을 달라고 힘없이 울어대고 있었다.
그나마 성한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는데,
나이가 많아서 어떻게 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예리세이 노인은 부랴부랴 우물을 찾아 그 가족에게 물을 떠다 주고
위장이 약해진 그들에게 빵을 조금씩 찢어서 먹여주었다.
그리고 가게에서 음식을 사오고,
페치카에도 불을 지펴주고,
저녁 때는 수프도 만들어 먹였다.
앞서 간 예핌 노인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죽어가는 그 집 가족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돌보는 사이에 사흘이 훌쩍 지나고,
간신히 움직일 만큼 기운을 차린 농부는
예리세이 노인에게 자기 집의 절망스러운 형편을 털어놓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리세이 노인은
저당잡힌 땅을 그 가족에게 찾아 돌려주고,
젖소와 짐수레와 밀가루도 사주었다.
그러고 나니 여비를 다 써버려서 남은 돈이 채 20루블도 안
됐다.
별수없이 그는 성지순례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왜 돌아왔는지 궁금해하는 가족들에게
“길이 어긋나서 예핌도 놓쳐버리고 돈도 모두 잃어버렸다.
순전히 내 탓이니 걱정하지 말거라“라고 말한다.
한편 예핌 노인은
예리세이 노인이 뒤따라오지 않는 것이 걱정스러워
연방 뒤를 돌아보면서도 예루살렘에 도착해 순례자들과 함께
마리아가 머물렀던 방에 가서 기도도 드리고 야곱의 교회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성당 구석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예리세이 노인이
머리에 후광을 받으며 제단 앞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가봤지만
그새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예핌 노인은 예리세이가 제단 아래에서 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을 보고 뛰어가봤지만 이번에도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쨌든 예핌 노인은 예루살렘에서 6주를 머무르면서 가져간 돈을 다 쓰고
집을 향해 가던 중
밝고 유쾌한 분위기가 감도는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게 된다.
그 집이 바로 예리세이 노인이 나흘 동안 머무르면서 도움을 주었던
그 가족들 집이었다.
예핌 노인은 그 가족들에게서
예리세이 노인이 그들에게 베풀어준 일들을 듣고
예루살렘에 가서 신에게 기도를 올린 자신보다
예리세이 노인이
더 신의 말씀을 따르는 데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후광을 받으며 서 있던 예리세이 노인의 모습은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예핌 노인은
잘 다녀왔느냐면 반갑게 자신을 맞는
예리세이 노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몸만 갔다 왔지.
돌아오다가 자네가 물 마시러 들어갔던 그 집에 들러
자네 얘길 들었네.
자네는 몸은 안 갔지만 영혼은 예루살렘까지 갔다왔더군.”
톨스토이는 이 짧은 단편을 통해
그 어느 말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보낸다.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네.
그 어느 것보다 영혼의 일이 먼저 질서가 잡혀야 편치 않겠나?”
“몸만 갔다 왔지.
돌아오다가 자네가 물 마시러 들어갔던 그 집에 들러
자네 얘길 들었네.
자네는 몸은 안 갔지만 영혼은 예루살렘까지 갔다왔더군.”
즉 아무리 열심히 신을 믿는다고 내세우고,
또 누구보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떠들어봐야
자신의 맑은 영혼을 닦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제 이기심과 아집, 욕심을 채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돕는 일을 외면하는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성지순례를 가고,
신 앞에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고 이마가 닳도록
기도를 드려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옆자리는 평소 자신의 영혼을 닦는 일에 충실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계명에도 나오긴 하지만,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걸까?
일본의 어느 교수는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나요”라고 묻는 학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정말로 학생들이 “왜 공부를 해서는 안 되나요?
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나요?
왜 집단따돌림을 해서는 안 되나요?라는 질문들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하는 것 같다.)
“그 살인에 희생당하는 사람이
너의 가족이거나 너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그 교수의 말대로라면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이웃이 바로 너의 가족이거나
너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