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님 이야기♠

할머니에 대한 기억

비타민님 2018. 9. 16. 17:41


나는 실향민으로 광복이 된 다음 해에

3살의 나이에 부모님 등에 엎혀  삼팔선을 넘어 월남을 한다.

물론 양가의 친 할머니,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할머니 집에 간다는 말이

나에는 이해가 안되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1학년 1학기는 부산에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느날 부모님이 안계시는데..

할머니란 분이 찾아오셔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바뻐서 가니 엄마에게 이모가 왔다고 하면 된다고 전하신다..

가시면서 동네 가게의 50여개 참외를 전부 사서 선물도 하신다.

철이 없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이었다.

 

어려운 보릿고개 시절에 부모님은 어머니의 이모님이 사시는

서울로 이사를 하시며,나는 고등학교 1학기를 혼자서 보낸다.

요름 방학에 오신 아버지는 이삿짐을 꾸리고

12시간이 걸리는 서울 기차 여행을 하고

할아버지(어머니의 외삼촌)네 집에 도착을 하게 된다.

처음으로 쌍둥이 이모를 만나는데,나 보다 나이가 4살이나 어린..

이모라니참으로 이해가 안가는 일이 있었다.

 

다음 날 할머니를 뵈러 가니 정말 늙으신 할머니인데,

나를 보시더니 좋아하신다..

이 할머니는 어머니의 이모이신 할머니의 시어머니이신

서울 태생의 이씨 왕조의 먼 후손이신 분이다..

동네에 고할머니와 같이 나가면 동네 아낙네들이

두 손을 모으고 아가씨-아기씨라고 할머니께 인사를 한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을 보시면 전부 집으로 배달이고

상인들이 돈을 언제 받는지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삼촌과 내가 지나가면 돌집 도련님들이라고 수근거린다.

 

어느 날 처음으로 할머니 댁에서

자그마한 자게상에 잔뜩 차린 음식을 식모가 내 오고

독상을 받는데,내 생전 먹어보지 못한 진수성찬에

식후 엔 식혜도 나온다..

부자집 서울 살림은 풍족하고 맛이 있는 음식들이란 생각이다.

그 당시 할머니(어머니의 이모)는 육이오에 공산군에게 잡혀

남산에서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노할머니(시어머니)와 함께

두 과부가 3분 삼촌들을 키우며 사업에 성공하신 분들이다.

이 시절에 국회의원들은 찝차를 타던 시절인데,

할머니는 일제 코로나 승용차에 운전수도 있다,

우리 식구는 단칸방 세를 얻고 사는데..방이 없으니

큰 이층 양옥인 방이 많은 할머니 집에서 자고 공부도 한다.

밥은 집에서 먹지만 할머니 집에서 삼촌들과 먹을 때도 많았고

저녁 늦게 먹는 과일이나 간식은 나도 삼춘들과  똑같이 먹었다.

노할머니와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시고 삼촌들도 나를 좋아했다.

할머니(어머나의 아모님)는 내 외할머니를 아주 좋아하셨는데,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머니 보다는 할머니에게서 더 많이 들었다,

또 외할아버지는 윤씨,내 성은 최씨인데,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김씨인데,

늘 할머니는 형부(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를 보면서,

너는 우리 김씨네 손자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다..

참으로 날 사랑하시던 할머니이시다...

삼촌 중에 둘째는 나 보다 한살이 많고 학년은 같고,

막내 삼촌은 한살 아래이고 한 학년이 낮았다.

항상 샛이서 삼촌 조카하면서 한식구로 지낸 추억이 새롭다.

서울 인근에 포도원 6000평을 할머니가 가지고 있어

방학에는 포도원에 가서 살며 포도도 실컨 먹고 천엽도 한다.

 

주일 아침이면 할머니가 가정 예배를 꼭 하시는데,

온 식구가 성경 한 구절식을 읽고 짧게 설명도 하시는데,

할머니는 사서 오경을 훈장이신 증조 할아지에게 몰래 배우신

한학에 통달하신 머리가 수재이신 분이다.

예배가 끝나면 송경 책에 갈무리한 큰 돈을 꺼내서 헌금으로

삼촌과 나에게 주시는데 언제나 똒같은 금액을 차별없이 주신다.

어느 날 막내 삼촌이 나는 조카이니 덜 주어야 한다고 하니,

할머니는 천국에는 삼촌 조카의 구별이 없다고 설명을 하신다.

 

할머니 댁에서 세 삼촌이 결혼을 하는 혼인 예식과 피로연에서

많은 내가 모르던 서울 풍습을 배우게 되는데,까다롭다.

음력 설엔 어른들이 차례로 절을 받으시는데..이 것도 그렇다.

드 분 할머니 작고하신 후엔 7일장을 집에서 했고,

산소에서 호상은 큰 삼촌과 내가 앞뒤를 맡아서 했다.

 

이민 살이 하는 중에 나는 결혼을 하던 해에

혼수 준비를 하러 가신 아버지 편에 둘재 삼촌이

가족들과 동해안 휴가를 갔다가 해변에서 실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서 많이 울었다

 

그 후에 십 수년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이 곳의 모 한인 교회에 나가는데,

이 교회에서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 분을 만나는데..

할머니를 잘 아신다.

이 분이 고등학교 시절의 나와 삼촌에 대한 말도 하신다..

나의 큰 삼촌 되시는 분은 나와는 잘 지내신 분이지만,

할머니기 작고하신 후에 많은 재산을 혼자서 독차지하시고

돈이라면 심할 정도로 형제도 친척도 없는 성품이신데,

교회에서 장노가 되시고 가족들은 삼촌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가고

한 여자를 만나 동거를 하신다며, 그 후에 중풍이 들었다고 하신다. 

또 막내 삼촌은 티비 프로듀서를 하다가 빚을 지게 되어

형인 큰 삼촌에게 도와달라고 하나 거절을 당한단다..

좌절한 막내 삼촌은 결국 자살을 한다는 슬픈 이야기 이다..

만일 내가 함께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터이고 나는 도왔응 것이다.

살아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하시고 열심히 시신 분들의 집안인데..

나를 좋아하던 두 삼촌이 죽는 걸 보고 많은 회의와 의문을

하나님에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맘씨 고운 둘째 삼춘 엄마, 나의 사촌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 수도..연락도 할 수가 없다.

 

은혜를 입은 할머니 댁에 갚을 길이 없다..